美 제조업 생존 비법 제시한 ‘자너’, 건축 거장과 협업…불황 몰라

내년 7월께 완공될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이라크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은 세계 최대 규모의 비정형 건축물로 4만5000여 개의 은빛 외장 패널이 들어간다. 여기에는 독특한 디자인의 각종 금속 외장재가 필요한데, 미국의 건축 외장재 전문 기업 자너(zahner)는 이 같은 특수 건축 외장재를 만드는 업체다.

미국 내 금속 가공 업체들이 중국산 저가 공세에 밀려 속속 문을 닫는 가운데 115년 역사의 자너는 프랭크 게리, 자하 하디드, 렘 쿨하스 같은 거장 건축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미국 제조업체들에 생존 비법을 제시하고 나섰다. 스타 건축가를 뜻하는 ‘스타키텍트(starchitect)’를 위한 맞춤형 외장재로 새로운 고부가가치 시장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지난 10년간 미국 제조업체들이 560만 개의 일자리를 잃을 정도로 경쟁력을 상실해 퇴락한 상황에서 중서부 미주리 주 캔자스시티의 한 중견 금속 가공 업체인 자너가 미 제조 업계에 생존 비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자너는 파격적인 건축 디자인의 전설로 불리는 프랭크 게리와 30여 개 건축 프로젝트에서 협력하며 기술력을 과시했다. 1988년 국제금속가공협회 기념 건축물을 만들 때 게리와 손잡은 이후 30여 년간 협업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스페인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뮤지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드용뮤지엄, 뉴욕 맨해튼의 9·11 추모 기념관 등에 자너가 특수 제작한 초대형 구리 외장재 등이 사용됐다. 정면과 측면, 배면의 형상과 질감이 모두 다른 독특한 건축물들은 자너의 마감재가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다는 평가다. 미시간 주 렌싱에 있는 하디드가 디자인한 브로드아트뮤지엄과 쿨하스의 주요 작품에도 자너의 생산품은 빠지지 않았다.

고부가가치 신시장에 집중

자너는 미국과 유럽의 대규모 건축 시장이 침체에 빠지면 중동·중남미·중국 등지의 대형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해 ‘불황을 모르는’기업이 됐다. 캔자스시티의 두 개 공장에 있는 120여 명의 금속 전문가들은 연간 4000만 달러(45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런 실적은 모두 다른 회사에선 기술력 부족이나 제조원가를 맞추지 못해 생산을 포기한 독특한 디자인의 대형 외장재 사업에 집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1970년대까지 건축 부재(部材)인 금속 코니스 등 단순 금속 가공품이 주력 사업이었지만 이후 기술 개발에 집중, 예술품에 가까운 초정밀 건축 외관 자재 전문 업체로 변신한 것이다.

FT는 자너가 다른 미국 제조업체들과 달리 슬럼프에 빠지지 않는 이유로 ▷범용 제품 생산 대신 고부가가치 첨단 제품에 집중한 점 ▷미국 내 시장뿐만 아니라 글로벌 고급 예술 시장을 개척한 것 ▷혁신적인 유명 예술가 및 건축 업체와 협력 체제를 구축한 점 ▷제품 디자인 단계부터 고객을 참여시켜 시너지 효과를 키운 점 등을 꼽았다.

또 최고경영자(CEO)부터 금속 가공 업체라기보다 과학연구소를 표방하고 직원의 90%가 넘는 105명을 연구·개발자들이 차지할 정도로 기술 개발에 집중한 점도 한몫했다. 회사 스스로도 “금속 가공 공장이라기보다 과학 연구소에 가깝다”고 말할 정도로 연구·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창업자의 증손자인 빌 자너 CEO는 “캔자스시티 내 다른 금속 가공 업체들은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에 밀려 줄줄이 공장 시설을 경매에 내놓고 있다”며 “하지만 자너는 거장 건축가들과 손잡고 실험적인 제품을 꾸준히 선보이면서 오히려 중국·카타르·일본에서 견학 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고 말했다.



김동욱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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