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넘어설 최고의 제약사는]약가 인하·한미 FTA 발효… 특별 설문 조사

제약 담당 애널리스트 15명 특별 설문 조사

국내 제약 업계가 유례 없는 위기를 겪고 있다. 오는 4월 시행되는 약가 일괄 인하로 연간 1조7000억 원의 매출이 연기처럼 사라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로 타격을 가장 크게 입는 업종 또한 제약이다. 그야말로 제약 업계가 패닉 상태에 빠져 있다. 중소제약사는 물론 대형 제약사도 휘청거리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다시 도전하고 다시 뛰어야 한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다. 복제 의약품(제너릭)과 구시대적인 영업 방식에 의존했던 과거의 관행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버텨낼 수 없다. 신약 개발, 글로벌화, 윤리 경영, 주주 가치 경영 등 글로벌 기준에 맞는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 한경비즈니스는 국내 제약 산업의 재도약을 위해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패러다임에 걸맞은 제약사를 찾아 나섰다. 누구보다 제약 산업을 잘 이해하고 있는 증권사 제약 담당 애널리스트를 대상으로 어느 기업이 새로운 시대를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지 심층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가 될 돋보이는 의약품도 알아봤다.

“제약 업계가 아수라장입니다.” 한 제약사 홍보 담당자의 한탄이다. 오는 4월 시행되는 약가 일괄 인하를 앞두고 제약 업계는 초긴장 상태다. 매출액 기준으로 ‘톱 10’에 속하는 일부 상위 제약사 관계자들도 “올해 영업 적자가 불가피하다”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언 땅을 녹이고 봄을 알리는 새싹이 올라오듯 빙하기나 다름없는 제약 업계에도 희망의 샘물은 솟아나고 있다. 증권사 제약 담당 애널리스트들은 대부분 “이번 약가 일괄 인하는 제약 산업의 재편을 촉진하면서 체질 개선을 유도할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히려 경쟁력 있는 제약사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 애널리스트들의 주장이다.

돌파구는 신약 개발과 해외 진출이다. 국내 상위 제약사 관계자들에게 위기 타개책을 물어보면 답은 하나다. ‘신약 개발’과 ‘해외 진출’에 힘을 쏟겠다고 입을 모은다. 결국 신약 개발과 해외 진출에 성과를 내는 제약사 중심으로 국내 제약 업계가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 조심스레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경비즈니스는 향후 국내 제약 산업의 재도약을 주도할 제약사가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약 산업 전반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증권사 제약 담당 애널리스트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설문 조사는 ▷혁신 신약 개발 역량 ▷개량 신약 개발 역량 ▷글로벌화 ▷윤리 경영 ▷주주 가치 경영 ▷마케팅 ▷국내 최고 제약 전문경영인(CEO) ▷국내 제약 산업 기여도가 가장 높은 제약인 등 8개 부문에 걸쳐 이뤄졌다. 지난 3월 초에 e메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고 애널리스트 15명이 참여했다.

혁신 신약 개발 부문에서는 동아제약이 6표를 얻어 녹십자(4)와 LG생명과학(4)을 따돌리고 1위에 올랐다. 동아제약은 국내 시장에서 신약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맛본 유일한 제약사다. 위점막 보호제 스티렌과 발기부전 치료제 자이데나로 동아제약의 신약 파워가 국내 최고라는 것을 증명했다. 2002년 개발한 스티렌은 지난해 880억 원의 매출을 올렸고 2005년 선보인 자이데나도 연매출 200억 원을 기록했다.

녹십자와 LG생명과학도 신약 개발에 강한 제약사로 인정받았다. 백신 개발에 강점을 갖고 있는 녹십자는 바이오베터(개량 바이오 복제약), 희귀 의약품, 합성 신약과 천연물 신약 등으로 연구·개발(R&D) 파이프라인을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LG생명과학은 2003년 국내 최초의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 합성 신약인 ‘팩티브’ 개발 등으로 주가를 높인 데다 R&D 투자가 매출의 20% 가까이 될 만큼의 공격적인 투자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개량 신약 부문에서는 한미약품이 15명 중 14명의 선택을 받아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R&D 투자비와 연구 인력(456명)이 국내 최강 수준인 데다 2004년 발매된 고혈압 치료제 ‘아모디핀’은 국내 개량 신약 붐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이후 혈전 치료제 ‘피도글’, 역류성 식도염 치료제 ‘에소메졸’, 복합 고혈압 치료제 ‘아모잘탄’ 등 개량 신약을 잇따라 내놓아 국내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점이 평가 받았다.

글로벌화 부문에서는 LG생명과학이 녹십자·한미약품·동아제약 등을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다. LG생명과학은 2008년 국내 제약 업계 최초로 1억 달러 수출탑을 수상했고 지난해에는 자체 개발 의약품 약 1500억 원어치를 수출했다. LG생명과학의 전체 매출 가운데 해외 비중은 40%에 달할 정도로 높다. LG생명과학은 올해 글로벌 사업 부문을 신설하고 인도·중국·중동 법인에 이어 주요 거점 국가에 신설 법인 설립에 적극 나설 계획이다. 글로벌 R&D 네트워크인 베이징한미약품연구센터를 두고 있는 한미약품과 슈퍼 박테리아 타깃 항생제인 슈퍼 항생제 DA-7218을 미국 트리어스 테라퓨틱스사에 기술이전한 동아제약 등도 이번 조사에서 주목받았다.

윤리 경영 부문은 단연 유한양행이 돋보였다. 10명의 애널리스트가 윤리 경영을 가장 잘하는 제약사로 유한양행을 꼽았다. 유한양행 창업주인 고 유일한 박사(1895~1971)는 모든 소유를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않고 사회에 고스란히 환원해 ‘노블레스 오브리주’를 실천한 경영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유한양행은 투명성과 윤리 경영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 국내 최초로 종업원지주제(1936년)를 도입했고 제약 업계 최초로 기업공개(1962년)를 했다. 이어 국내 최초로 스톡옵션 도입(1993년)과 제약 업계 최초의 정년 연장(2010년) 등을 시행했다.

마케팅 부문에서는 대웅제약(5)이 동아제약(4)과 종근당(3)을 근소한 차이로 따돌리고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대웅제약이 1위에 오른 것은 축구선수 차두리가 출연하는 ‘우루사’ CF가 히트를 쳤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종근당은 아이돌 그룹 JYJ가 출연하는 ‘펜잘큐’ 광고의 유명세가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주주 가치 경영 부문은 녹십자가 7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동아제약(5)이 그 뒤를 따랐다.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최고경영자(CEO)의 역할이 무엇보다 크다. 최고의 전문 경영인을 뽑는 설문 조사에서는 김원배 동아제약 사장이 1위에 올랐다. 이병건 녹십자 사장과 이관순 한미약품 사장, 정일재 LG생명과학 사장이 그 뒤를 이었다.

김원배 사장은 2003년 3월 CEO 자리에 올라 회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1974년 동아제약에 연구원으로 발을 들인 김 사장은 이후 30년 만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김 사장은 동아제약을 제네릭(복제약) 중심 회사에서 신약 중심의 회사로 탈바꿈시킨 주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신약인 스티렌(위궤양 치료제)과 자이데나(발기부전 치료제)는 김 사장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국내 제약 산업 발전 기여도가 가장 큰 제약인을 뽑는 조사에서는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이 선정됐다. 허영섭 고 녹십자 회장,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이 각각 2, 3위를 차지했다. 강 회장은 동아제약이 국내 1위 자리를 공고히 하면서 신약 개발, 해외 진출 등을 선도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취재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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