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PD로, 밤에는 작가로 ‘완벽 변신’

‘두시 탈출 컬투쇼’ 이재익 PD

달변이다. 입담 좋은 두 남자 ‘컬투’의 정찬우와 김태균을 매일 ‘상대’하는 사람답다. 질문마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명쾌한 답변들…. 사실 그의 인생 자체가 그렇다. 결과론적으로만 말하면 그는 비슷한 또래인 기자가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살았나’라며 ‘좌절하게’ 만드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다.

현재 그는 부동의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그램인 SBS ‘두시 탈출 컬투쇼’의 담당 PD다. 게다가 최근 100만 이상의 관객을 끌어 모은 영화 ‘원더풀 라디오’의 원작자이자 시나리오 작가다. ‘원더풀 라디오’는 현직 PD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지만 소설가 또는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그의 작품 세계는 로맨스·역사·미스터리 등 온갖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이재익, 묻지는 않았지만 재주 재(才)에 더할 익(益)자를 쓴다면 그야말로 이름값 한번 제대로 하며 사는 셈이다.

대학 시절 등단, ‘생계형’ 작가 싫어 취직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그의 프로필에는 ‘소설가’라는 타이틀이 먼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작가가 된 것은 서울대 영문학과 재학 시절의 얘기다. 그의 나이 스물 셋이던 1997년 장편소설 ‘질주질주질주’가 월간 ‘문학사상’ 소설 부문에 당선돼 화려하게 등단했다. 이후 ‘노란잠수함’, ‘심야버스 괴담’, ‘카시오페아 공주’, ‘서울대 야구부의 영광’, ‘아버지의 길’ 등 10여 편이 넘는 소설을 집필했다. 여기에 ‘목포는 항구다’ 등의 시나리오까지 합하면 전업 작가라고 해도 ‘빠지는’ 결과물은 아니다. 일찌감치 글 쓰는 재능을 인정받았으면서도 굳이 ‘다른’ 직업을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세속적 인간이었어요.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좋은 직업과 좋은 집, 이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다시 말하면 전업 작가가 되어서 돈을 위해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생계를 위한 직업이 필요했죠.”

그래서 최종적으로 정착한 방송국 PD라는 직업. SBS는 그의 세 번째 직장이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외국계 음반 회사였다. 그런데 딱 한 달 다니고 회사를 그만뒀다. 외국 아티스트가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스케줄 전반을 챙기는 동안 지금 생각하면 ‘치기 어린’ 굴욕감 같은 걸 느껴서라고 했다. 그 후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광고 회사에 입사해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그러나 그것도 1년. 밥 먹듯 밤을 새우는 불규칙한 스케줄로 글을 쓸 시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을 그러고 나니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자괴감이 들더군요. 몇 달을 술만 마셨어요. 가족들도 걱정을 많이 했죠. 또 그만둘까봐 취직하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방송국 입사는 생각도 안 했는데, MBC에서 작가로 일하고 있던 여동생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한번 해보라며 대신 원서를 넣어줬죠. 방송사에서는 그동안 제가 책을 낸 것과 영화 작업을 했던 경험을 높이 사주더군요. 사실 직장 생활에 실패한 후 ‘백수’로 지낼 때는 그 경험을 저주했거든요. 그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런데 필기시험에선 거의 꼴찌인 제가 그 경험 때문에 합격한 거예요. 인생이란 게 참 재밌죠.”

어느덧 입사 12년 차. 라디오 PD로서의 삶은 만족스럽다. 더구나 매일 생방송을 하며 느끼는 ‘쾌감’은 대체재가 없을 정도다. 물론 라디오 프로그램 청취율이 대개 3~6% 전후인 현실에서 청취율 18%를 넘나드는 ‘초대박’ 인기 프로그램을 담당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청취율이 떨어질까 ‘피가 마르는’ 부담감도 없진 않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궁금해진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한들 PD와 작가로서의 철저한 이중생활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주경야필, 철두철미한 자기 관리의 결과물

천재냐고 물었다. 프로그램을 하면서도 끊임없는 작품 활동까지 겸할 수 있었던 걸 보면 분명 남과는 다른 뭔가가 있을 터였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거죠. 다행히 저는 전환 모드가 좀 빨라요. 소설도 쓰고 시나리오도 쓰지만 소설에서 풀리지 않는 소재를 버리지 않고 시나리오에서 쓰기도 하고 영화사에서 ‘주문’한 소재로 다양한 장르의 시나리오를 써본 경험이 소설 집필에도 도움이 되죠. 예능을 좋아하지 않는데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 일처럼 프로그램을 찾다 보니 감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PD라는 직업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15년 작가 경력은 라디오를 하면서 스토리를 캐치해 내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니 시너지 효과도 분명 있어요.”

다른 이들과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지점은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컨트롤이다. 그의 라이프사이클을 보면 방송과 글쓰기 외에는 없다. 친구들을 만나지 않다 보니 연락 끊긴 지는 몇 년 됐고 영화사와의 미팅 등으로 저녁 술자리를 가졌을 때도 ‘만취’가 아니면 작업실에 가서 글을 쓴다. 낮에는 PD로, 퇴근 후 밤에는 작가로의 ‘완벽한’ 변신이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과 오해로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행히 좋아졌다.

“요즘 중고생들이 저를 찾아와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마다 많이 묻는 게 시간 관리에 대한 것입니다. 그럴 때 저는 시간을 어떻게 내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안 해도 되는지에 초점을 맞추라고 말해요. 안 하면 큰일 날 일들만 하면 시간은 많아요.”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이미 많은 것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피곤한’ 삶을 계속하는 이유가 뭘까. 그는 “소설가도 직업인데 하고 싶을 때만 한다면 직업이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사실 겉으로 보면 ‘성공 가도’를 달려온 것 같지만 그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등단작을 영화화한 ‘질주’가 그야말로 ‘쫄딱’ 망한 뒤 스태프들이 행방불명되는 걸 보면서 세상의 무서움도 알았고 초년의 이른 성공이 가져다준 일종의 자만심으로 인해 직장 생활에 실패도 해봤고 7~8년 전에는 지독한 슬럼프도 겪어 봤다. 위기를 넘기며 지금까지 그를 달리게 하는 원동력이 내부에 있었다면 최근 들어서는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주는 사명감도 없지 않다.

“남들이 볼 땐 자는 시간 외엔 일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공부하고 취재하는 모든 과정을 논다고 생각해요. 물론 ‘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만 갖고는 이렇게까지 독하게는 못하겠죠. 몇 년 전부터 저를 롤모델로 생각하는 친구들이 연락하기도 하고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걸 느끼면서 사명감이 생겨요. 특히 신경 쓰이는 건 작가 지망생들이죠. 공학의 기초 학문이 자연과학이듯 글쓰기의 본령은 소설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작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건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소설을 쓰면서도 강남에 아파트를 사고 재규어를 끌고 다닌다는 걸 많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철두철미한 이중생활의 또 다른 결과물이 곧 독자와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2004년 밀양 성폭행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소설 ‘40’과 지난해 내놓은 ‘씽크홀’을 원작으로 한 블록버스터 영화가 그것이다.

“우리나라 소설가 하면 제 이름이 떠오르는 정도가 되는 것, PD로서는 ‘컬투쇼’ 같은 프로그램 하나 더 만드는 것, 시나리오 작가로는 1000만 명 관객이 드는 블록버스터 한번 써보는 것이 인생 목표예요. 영화 쪽에서 가장 빨리 이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웃음).”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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