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융합의 선각자 칸트, 진실만이 충성과 프라이드를 가져온다
입력 2012-03-22 15:01:24
수정 2012-03-22 15:01:24
김형철 교수의 고전에서 배우는 CEO 리더십
일본의 한 우유 회사 제품을 복용한 고객들에게 식중독이 발생했습니다. 그 회사는 “자사 제품에는 문제가 없다. 아직 구체적 연관 관계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적극적으로 조치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피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오사카 시 보건 당국은 강제 리콜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우유 회사의 사장은 마지못해 기자회견을 통해 진실을 밝힙니다.
“공장에 있는 기계 중 하나가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하지만 그 기계는 가동 중단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자사 제품을 계속 애용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소비자 보호 시민단체와 동행한 TV 방송국 기자가 문제의 그 기계가 그 후에도 계속 작동하고 있는 것을 현장에서 보도했습니다. 그러자 일본 소비자들의 분노는 폭발합니다. 전국적인 불매 운동이 전개됐고 다음해 그 사장은 사퇴했으며 일본 최대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던 회사는 결국 부도 처리되고 말죠. 여러분도 잘 아는 스노우유 이야기입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칸트
왜 우리는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할까요.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보복이 두려워서, 기분이 상할까봐, 변화가 무서워서, 왕따 될까봐, 지지를 상실할까봐,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체면이 손상 될까봐”라고 말입니다. 이 변명들에 담긴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손해 보기 싫다는 이기심 그리고 손해 보는 것이 겁난다는 비겁함입니다. 이처럼 진실을 소통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이 불편한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실과 마주하고 그것을 밝혀야 할 이유는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성이 최대의 설득력을 가집니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 아직도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꼭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칸트입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산책하고 루터교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평생 절제하고 금욕적으로 살았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태어난 동네를 벗어나지 않고 평생 살았죠.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칸트는 반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가르친 토픽은 딱딱하기 그지없는 철학적 주제였지만 강의실은 항상 학생들로 넘쳤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하죠. 무척 유머러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칸트의 한마디에 사람들은 배꼽을 잡았습니다.
또 전 세계 지리·경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시간 강사 생활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나름 도가 텄던 것이죠. 또 요즘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처럼, 동료 학자들이 아니라 사회 각층의 다른 분야 사람들과 꼭 점심을 같이했습니다. 결코 외톨이 샌님 학자가 아니었죠.
여러분은 요즘 동종 업계와 거래처를 빼고 어떤 다른 분야의 사람을 만나셨는지요. 보통 전문가라고 하면 자신의 분야에 정통한 사람을 말하는 것 같지만 요즘은 다릅니다. 전문가와 전문가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전문가인 시대가 됐습니다. 그래서 소통, 소통하고 융합, 통섭까지 나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칸트는 융합의 선각자였습니다.
칸트가 주창한 것은 간단합니다. 이 세상의 도덕법칙은 문화나 사회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도덕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다 적용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적용하고 자신은 예외로 돌리는 것은 용납될 수 없죠.
이것을 서양에서 찾자면 ‘성경’의 예수의 말씀, ‘남이 네게 하기를 바라는 일을 네가 먼저 남에게 하라’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칸트는 이것을 한 단계 더욱 격상시키려고 했습니다. 모두가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아무런 논리적 모순이 없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행동의 결과가 아무리 참혹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으로 ‘거짓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말은 가급적 안 하는 것이 좋다’라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으로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여러분 마음속에 지금 수많은 질문들이 꿈틀할 것입니다. 뭐 당시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인지상정이죠.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 집주인에게 호소합니다. “지금 무지막지한 살인마에게 쫓기고 있는데, 좀 숨겨 주세요. 그리고 그 사람이 여기 곧 올 텐데, 그때 이 집에 없다고 좀 말해주세요.” 그러곤 집 안에 황급히 뛰어들어가 숨습니다. 과연 조금 있으니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손에 도끼를 들고 나타납니다. 자, 그럼 당신이 그 집 주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칸트는 이 상황에서 그 사람이 자신의 집에 숨어 있다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증명은 이렇습니다. 만약 집에 있다고 진실을 말해 그 살인마가 그 사람을 발견해 죽인다면 그 살인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입니다. 집 주인은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집에 없다고 한 말을 듣고 그 살인마가 집 뒤로 돌아갔는데 집주인을 믿지 못한 사람이 집을 나와 도망치다가 길에서 붙들려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집주인의 책임입니다. 이처럼 거짓말은 우리 삶의 인과관계를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상대의 인격 존중을 의미해
칸트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을 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내가 상대에게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객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는 기업은 소비자를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객이 모욕당했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고객이 일단 그것을 느꼈다면 수습할 때는 이미 지났습니다. 절대적인 최선의 방법은 사전에 미리 솔직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소통은 상대의 인격을 존중해 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느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결정을 자기 스스로 내린 것이라고 느낄 때 동기부여가 됩니다. 아니 적어도 자신이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있을 때 주인 의식을 느끼죠. 그래서 리더는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된 정보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러면 거짓말은 항상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거짓말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고, 또 장기적으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고 협조를 구하는 리더는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진실’만이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조직에 충성하고 프라이드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