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 라이프] “내 인생의 반은 오디오와 레코드”

조병문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한번 보실래요?” 마치 ‘오디오 숍’을 방불케 하는 사무실에서 그가 들고 나온 것은 차트웰 브랜드의 오디오로, BBC 방송국에서 쓰던 것이라고 했다. 구한 지 2년 정도 됐다는데 요즘은 그걸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귀한 오디오들은 대부분 사무실이 아닌 집에 ‘모셔져’ 있지만 좀 더 자주 보기 위해 사무실에 가져다 뒀다. 마치 갓난아기 다루듯 오디오를 다루는 손길이 무척 섬세하다.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조병문(49) 전무는 소문난 오디오 마니아다. 그 스스로는 마니아를 넘어 ‘환자’라고 표현한다.

‘명기’를 얻기 위해 10년의 기다림

“갖고 싶은 오디오를 구했을 땐 우리 아이들을 얻었을 때만큼의 희열을 느끼죠. 반면 그로 인해 스트레스도 많이 받죠. 물건이 구해지지 않을 때도 그렇고, 어쩌다 상처라도 나면 내 몸에 상처 나는 것보다 더 아픕니다. 혹 긁힐까 싶어 이사도 못 가요.”

한 사람의 인생 스토리를 구성하는 요소는 수만 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본으로 있는 가족과 비즈니스, 친구 등등을 제외하고도 사람마다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다. 조 전무의 스토리는 단연 ‘오디오’다. 한 가지 더 보태자면 레코드도 포함된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인생의 반은 오디오와 레코드”라며 “삶을 같이하는 친구이자 벗”이라고 말하는 그다.

오디오 아이템 하나를 얻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은 보통 5년에서 10년이다. 돈이 있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1930년대 것부터 40~50년 전 ‘명기’까지 그가 소장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물건’을 구하러 미국이나 영국으로 떠나는 것도 일상다반사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발달해 국내외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시절에는 세운상가 오디오 숍을 도는 게 일과였다. 심지어 저녁 약속이 있을 때도 한바퀴 ‘돌아보고’ 갈 정도였다.

“좋은 물건이 들어왔나 매일 보러 가는 거예요. 미리 일정 금액을 맡겨 놓고 찾는 물건이 들어오면 연락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요. 한번은 프리앰프를 구하려고 하는데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구할 수 없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오래 거래하다가 발길을 끊은 지 좀 된 오디오 숍에 갔는데 그 앰프가 거기 있더군요. 로또 맞은 기분이었죠. 전엔 구하고 싶은 물건이 잘 구해지지 않으면 신경질이 났는데, 이젠 마침내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 기계에 대해 혼자 공부하면서 주인이 될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그처럼 절실함 끝에 얻은 물건을 돈으로 환산하기란 불가능하다. 500만 원, 1000만 원이라고 해도 그에게는 몇 십억 이상의 가치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작 그 기쁨을 함께해야 할 아내는 오디오 이야기라면 질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음악을 전공한 아내도 처음엔 ‘협조자’였다.

근무 중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남편을 대신해 물건을 공수해 오기도 하던 아내는 남편이 점점 오디오에 ‘집착’하면서부터 돌아섰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뛰어다니는 아이들로부터 오디오를 지켜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웃음). 아내는 아이가 중요하느냐, 오디오가 중요하느냐며 서운해 했죠. 그 후로 많이 싸웠어요.”

남들은 모르는 오디오 세계의 즐거움

오늘의 그를 만든 건 중학교 2학년 무렵 레코드로 팝을 듣기 시작하면서였다. 레코드를 듣다 보니 당연히 좋은 턴테이블·카트리지(일명 ‘바늘’)·앰프·스피커 등을 선호하게 됐던 것. 오디오가 바뀔 때마다 소리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 후로는 오디오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당시에 아버지가 한 달 용돈으로 2만 원을 주셨어요. 그때 짜장면 한 그릇이 200원이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40만 원 정도 되는 돈이었죠.

저는 그 돈으로 떡볶이를 사 먹지 않고 전부 레코드를 샀는데 딱 4장 살 수 있었어요. 광화문레코드·올리버·예음사 등 세 군데서만 구할 수 있었던 오리지널 레코드였죠. 학교만 끝나면 새로 들어온 게 없나 싶어 레코드숍을 돌아다녔어요. 그러니 당연히 어머니는 너무너무 싫어하셨죠. 솔직히 레코드와 오디오를 몰랐더라면 공부를 더 열심히 했겠죠. 그땐 어머니가 무서워 사고 싶은 레코드와 오디오를 못 샀고 결혼 후엔 아내가 무서워 못 샀어요(웃음).”

다행히 아버지는 늘 아들 편이 돼 줬다. 아들을 위해 당시 정말 귀했던 JVC 오디오 시스템을 사준 것도 아버지였다. 오디오도 그렇고 애널리스트 시절 밤을 꼴딱 새워 리포트를 썼던 것도 그렇고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기질은 아버지를 닮은 것이었다. 요즘은 아이들이 그의 편이다. “이 귀한 기계들이 결국은 너희들의 것”이란 말로 ‘세뇌’한 덕분이다.

지금이야 사고 싶은 오디오를 거의 다 샀기 때문에 평정심을 찾았지만 한창 ‘미쳐 있던’ 시절에는 일본 출장을 가서도 비즈니스가 끝난 뒤 오디오 마니아들을 만나 대화하고 ‘물건’을 구경하는 게 더 큰 ‘목적’이고 즐거움이었을 정도다. 지금도 오디오에 열광하는 이들을 만나면 밤 새워 수다를 떨기도 한다.

국내에도 대략 1000명 정도 되는 오디오 마니아들이 있지만 이제 그는 ‘수준급’ 레벨에 올라섰다. 바둑으로 치면 프로급이다. 주변에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들은 그의 ‘수준’을 부러워한다. “저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 이들도 있고 반대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도 있어요. 대부분은 좋은 취미를 갖고 있다고 부러워해요. 사실 직장인의 라이프스타일이란 게 비즈니스나 골프, 술밖에 없는데, 저는 남들이 모르는 세계 하나가 더 있는 거니까요.”

얘기가 끝나갈 무렵 오디오에 대한 본격 강의가 시작됐다. 집에 있는 오디오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 터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음악의 소스에는 레코드 즉 LP(턴테이블)·CD(CD플레이어)·튜너 등이 있다. 소스에서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면 프리앰프로 먼저 오고 그 다음엔 파워앰프·스피커로 흘러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레코드는 포노앰프를 한 번 거친 후 프리앰프로 간다. 프리앰프는 사람의 머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 전무는 프리앰프·포노앰프순으로 좋아하고 또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오디오는 ‘궁합’이 중요해요. 턴테이블·톤암·카트리지도 각각 잘 맞는 궁합이 있고 오디오 역시 프리앰프·파워앰프·스피커의 궁합이 잘 맞을 때 최상의 소리가 나오죠. 비싼 것들을 조합해 놓는다고 해서 좋은 궁합이 아니에요. 가격은 얼마 안 돼도 궁합이 좋으면 그게 진짜죠. 물론 그 궁합을 깨닫기까지는 엄청난 내공과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펀드매니저들이 똑같이 공부해도 내공에 따라 수익이 달라지는 것처럼 오디오 역시 궁합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고수’가 갈리죠.”

원티드 아이템인 오디오와 블루노트 1500번대 시리즈 6장 포함 레코드 8장의 ‘목표’를 가진 그는 평생에 걸쳐 꿈을 실현할 계획이다. 스타 애널리스트 출신에, 리서치센터장이 된 후에도 리포트를 ‘전투적’으로 쓰기로 유명했던 그의 열정은 괜한 게 아니었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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