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연봉 부농 되는 법] 꽃양귀비·블루베리로 농장 일궈

부농 성공 사례  김용길 풍차꽃농장 대표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에 자리한 ‘풍차꽃농장’은 6월 초부터 붉은색의 ‘꽃양귀비(개양귀비)’가 흐드러지게 마을 동산을 덮는다. 이천의 산수유 축제나 광양 매화 축제, 진해 군항제 등은 자연적으로 조성된 꽃나무들이 대규모 군락을 이룬 것이지만 이곳의 꽃양귀비는 모두 한 사람이 심었다. 풍차꽃농장의 김용길 대표다.

김 대표는 2006년 육군 대령으로 만기 전역한 제대군인 출신 농부다. 특이한 이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제대하던 해 6월에는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하다. 그가 키우는 꽃양귀비·블루베리·우리밀·조경수 등도 흔히 볼 수 없는 특화 작물들이다. ‘군인과 농부, 화가’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김 대표의 모습이다.

“주로 기무사 등 정보 분야에서 36년을 일했어요. 임관 초기에는 그림 그린다고 야단도 많이 맞았죠. 장교는 전투가 직업인 사람입니다. 정서가 메마르기 쉽죠. 그럴수록 그림·음악·문학 같은 주특기가 있어야 해요.”

장교 임관 후부터 취미 삼아 그리기 시작한 그림. 하지만 지금은 1000만 원의 판매가를 기록한 중견 화가다. 1968년 인천 제물포고를 졸업한 김 대표는 어려운 집안 환경 탓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과수원을 하던 아버지를 도와 1년간 농사일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중간상인들의 착취에 절망했고 ‘출세해서 제도를 뜯어고치자’는 일념에 삼수 끝에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등록금 걱정 없이, 밥걱정 없이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육군 대령 출신 농부

공식 전역은 2006년이었지만 2005년부터 사회 적응 기간을 거쳐 ‘귀촌’에 나섰다. 강원도 원주는 1993년 말 1군사령부 근무 시절 눈여겨보던 곳이었다.

1993년 기무사에서 1군사령부로 옮기며 본격적으로 다시 그림에 몰두했다. 그 당시 1년 동안 그린 그림이 생도 시절 그린 그림의 양보다 많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집을 짓고 정착해 그림을 그리고 텃밭 정도나 가꾸는 ‘귀촌’ 개념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교 졸업 후 농사를 지었던 생각이 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감각은 남아 있었다.

“마을 경관이 너무 좋았어요. 다른 건 말고 이 마을만이라도 개발해 보자고 결심했죠. 잘사는 마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자 마을을 만들려면 사람을 끌어 모아야 했어요. 그때 고민하던 차에 알게 된 게 꽃양귀비입니다.”

당시만 해도 꽃양귀비를 재배한 곳은 경기동 포천군 일동의 뷰식물원 한 곳밖에 없었다. 풍차꽃농장이 국내 꽃양귀비 재배 2호가 된 셈이다.

“꽃양귀비는 이제까지 본 꽃 중 가장 화려해요. 또 양귀비 하면 미인이 연상되고 ‘마약’의 재료라는 호기심도 대단하죠. 직접 와서 꽃을 본 사람들이 모두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곤 합니다.”

꽃양귀비 재배와 축제를 열며 본격적인 마을 개발에도 나섰다. 2008년에는 마을 이장을 설득해 강원도에서 주관하는 새농어촌 건설 추진 운동에 응모했고 대상자에 뽑혀 5억 원을 지원받았다. 2010년에는 농림부로부터 녹색 농촌 체험 마을에도 선정돼 2억 원을 지원 받았다. 행정자치부의 아름다운 마을 가꾸기(참살기 마을)에도 선정돼 7000만 원을 받는 등 마을 개발에도 속도가 붙는 듯했다.

“양귀비 축제가 올해로 6년째입니다. 해마다 6월 초부터 20일 정도 소요되죠. 기대만큼은 아니더라도 마을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그 과정에서 토착민과의 갈등도 많았죠. 소설 책 한 권은 나올 겁니다. 애먼 땅에 뭔 꽃을 심느냐며 멱살도 많이 잡혔어요. 제일 넓을 때는 2만6440㎡(8000평)까지 심었는데, 올해는 꽃 마니아들 초청 형식으로 바꿔 6610㎡(2000평) 정도만 심으려고 해요. 그중 3305㎡(1000평)는 우리밀을 심고요. 양귀비와 밀은 생육 주기가 같아요. 노란 밀이 경관 작물로도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블루베리’도 2005년부터 꽃양귀비와 같이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블루베리는 대단한 희귀 작목이었다. 김 대표가 블루베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2003년부터. 미국 타임지에 10대 슈퍼 식품으로 소개되면서부터였다. 미국·호주·일본 등에서 고가에 팔리는 특화 작물이 반드시 돈이 될 것이란 판단이 섰고 어렵게 묘목을 구해 661㎡(200평) 정도 시험 재배를 시작했다. 원주 지역의 블루베리 재배 첫 번째 사례였다. 지금은 992㎡(300평) 정도에 290주 정도를 심어 놓았다. 작년 기준으로 블루베리로만 3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 992㎡에 3000만 원 매출은 웬만한 작목으로는 꿈도 꾸기 힘든 고수익이다.

“사실 (군인)연금 대상자이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꽃양귀비나 블루베리 모두 지금보다 미래 가치에 주목하고 시작한 것이죠. 돈을 많이 버는 부농이 되기보다 새로운 농법을 보급하는 농촌 운동가가 되고 싶습니다.”


고수익보다 과학 영농 보급 힘써

김 대표가 강조하는 건 친환경 농업, 그중에서도 ‘자가 발효 농법’이다. 한국발효농업연구소 회원이기도 한 그는 친환경 교육을 2년간 수료했고 지금도 액비(液肥: 물거름)를 직접 만들어 쓸 정도로 자가 발효 농법 연구에 한창이다. 화학비료가 득세하기 전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살아 있는 발효(퇴비 등) 농법을 되살리는 게 목표다. 발효농업연구소 강원·횡성 지부장 역할을 비롯해 원주체험협의회 부회장, 한국블루베리협회 회원,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원주지부 부회장 등 과학 영농 실현을 위해 백방으로 뛰는 이유다.

“한국블루베리협회 창립 멤버입니다. 이번 3월 5일에 원주의 블루베리와 블랙초코베리 농민들을 모아 치악산 베리연구회도 조직해 창립했죠. 저처럼 일찍 시작하면 어떻게든 돈은 벌게 돼 있어요. 대신 돈 된다는 말만 듣고 뒤늦게 시작하면 시행착오를 많이 겪을 수밖에 없죠.”

김 대표가 작년에 블루베리 재배로 얻은 순수익은 1000만 원 정도다. 양귀비 축제 때 모종을 팔고 체험객을 받아 수익도 냈다. 꽃양귀비 티셔츠 그리기 체험 등 농사일이 아닌 미술, 그림 체험 개념이다. 꽃 축제와 체험객 소득이 200만~300만 원 정도다. 이 밖에 강연과 인접 마을 컨설팅, 농고·교사 등 인턴십 강의, 농대생 실습 같은 농외 소득이 500만 원 수준이다. 1년 동안의 순수익이 2000만 원 정도인 셈이다.

“꽃양귀비든 블루베리든 비닐하우스에서 대량 재배에 나서면 억대 수입도 가능하겠죠. 노지(밭) 재배를 고집하는 건 되도록 자연 친화적인 재배 방법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닐하우스는 엄밀히 말하면 자연적인 햇빛과 빗물을 차단하는 시스템이죠. 저는 제 나름의 액비를 만들어 쓰고 있는데, 화학비료가 나오면서 전통 방식이 다 끊어지고 말았어요. 예전엔 똥과 퇴비로 발효해 농사를 지었죠. 된장과 김치도 마찬가지로 발효가 핵심이에요. 농사를 생명산업이 아닌 공산품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땅·가축이 탈이 나기 시작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김 대표는 귀농을 꿈꾸는 예비 농부들에게 조언도 잊지 않았다.

“최소 5년 전부터 미리 준비하세요. 땅 사고 집 짓는 게 처음이 아닙니다. 제일 먼저 인터넷에서 자료를 수집해 공부하고 관련 책도 사서 공부해야 합니다. 전 귀농·귀촌·작목, 심지어 은퇴 생활에 관한 책까지 사서 봤어요. 한마디로 ‘정보 자료 수집’ 단계죠. 그러면서 ‘견학’하고 관련자를 만나는 데 또 1년 이상 걸립니다. 이후에 팜스테이로 농사도 지어보고 실제 집을 얻어 살아보기도 하죠. 무조건 안빈낙도를 꿈꾸고 사람은 엉뚱한 땅 사고 집 지어 고생하는 걸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큰 집 필요 없어요. 난방비 감당하기도 힘들죠. 젊은이들이 많이 귀농하면서 요즘 트렌드도 소형화로 바뀌었습니다. 또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게 토착민과의 융화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죠.”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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