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연금 파탄 징후 위탁연금 ‘증발’…가입자 ‘날벼락’

“녹다운 아마추어가 링에 오른 결과다.”

연금 대국 일본에 대형 사고가 터졌다. 연금 선진국에 어울리지 않는 오명이다. 문제는 뒤질수록 양파처럼 유사 징후가 꼬리를 문다는 점이다. 생채기인 줄 알았는데 벗겨보니 몸 전체로 퍼진 악성 맹독의 확인이다. 지속 가능성에 확실한 의문부호를 던진 기업연금의 불안 스토리가 그렇다.

발단은 운용 대행사의 원금 손실 뉴스다. 투자자문 회사 ‘AIJ투자자문’이 고객(기업)의 위탁연금 2000억 엔의 대다수를 날려버린 게 적발됐다. 무리한 고수익 투자가 원인이다. 사기에 가까운 도덕 불감증이 사고를 더 키웠다. 감독 의무를 진 관계 당국은 사실상 손을 놓았다. 인재 사고다. 피해는 고객 몫이다. 노후 생활을 위해 월급에서 갹출해 온 쌈짓돈이 허공에 날아갔다. 이대로라면 더 이상 기업연금에 노후 희망을 걸 수 없게 됐다.

당초 사고 원인은 고수익 추구에 따른 무리한 기금 운용의 자충수로만 알려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양상이 달라졌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검은 내막이 밝혀져서다. 제몫을 챙기려는 낙하산 관료의 네트워크가 평범한 샐러리맨의 기업연금을 축낸 셈이다. 일반 기업의 연금기금(후생연금)을 AIJ처럼 투자자문 회사에 연결해 주는 브로커가 관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산케이신문는 연금 관리를 총괄하던 사회보험청(현재 일본연금기구) 출신 OB 646명이 399개 연금기금에 낙하산으로 내려갔다고 보도했다(2009년 5월 시점).

기업연금은 일본이 자랑하는 3층 연금 구조의 마침표다. 1층(국민연금)과 2층(후생·공제연금)의 공적연금을 보완하는 사적연금으로 샐러리맨의 노후 자금을 보완한다. ‘유유자적의 연금 생활’ 이미지를 완성하는 꽤 짭짤한 자금 루트다. 만액 조건(40년)을 갖춘 표준 모델(남성 전업, 여성 가사)이면 1~2층 공적연금 평균 수령액은 23만 엔대다.

고령 가구의 월평균 소비지출과 얼추 비슷하다. 다만 세후 기준으로 따지면 약 4만 엔 부족한데, 이를 벌충하는 게 3층이다. 3층은 월급 수준과 회사 사정별로 천차만별이지만 대기업은 평균 15만 엔 수준(확정 급여형)이다.

고율 연금 때문에 경영 파탄에 내몰린 JAL은 3층 평균만 25만 엔으로 상당 규모에 달했었다. 이번에 문제가 터진 것은 3층의 기업연금이다. 기업·사원이 자금을 분담해 만드는데 설치 여부는 자율이다. 2011년 3월 현재 3층 가입자는 1671만 명이다. 1층(6826만 명, 이 중 샐러리맨 3883만 명)과 2층(3441만 명)에 모두 겹치는 가장 탄탄한 연금 수급자다. 기업연금 운용액은 78조3957억 엔에 달한다.

일본이 자랑하는 3층 연금 구조 ‘마침표’ 찍나

AIJ의 피해자는 사실 빙산의 일각이다. 가입자 54만 명에 수급자는 34만 명 정도다. 모두 88만 명으로 3층 전체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다만 유사 사례가 잇따를 것이란 암울한 전망이 3층 가입자의 불안을 부추긴다. “리스크는 알았지만 이만큼 마이너스일지 몰랐다”는 반응처럼 뒤져보면 제2, 제3의 AIJ가 상당할 전망이다. AIJ에 연금 자산을 맡긴 기업 고객은 84개다. 이 중 73개는 업종·지역별로 중소기업끼리 뭉쳐 만든 기금(종합형)이다. 이들의 자산 총액은 1조9109억 엔인데, 이 중 9.7%가 AIJ에 배분됐다. 3곳은 자산의 절반을 AIJ에 집중했다.

현재 AIJ처럼 투자자문 회사는 265개사다. 이들 중 상당수가 불안한 상태다. 기업연금 쪽의 낮은 전문성도 문제다. 기업연금 중 80%가 운용 경험자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재정 불안(저부담·고급여)이 일상적인 판에 한 푼이라도 더 준다는 운용사를 멀리할 이유도 없다. 운용 목표를 5.5%로 잡고 기금을 유치한 운용사도 많다. 고위험·고수익의 무리한 자산 운용 배경이다. 무엇보다 중소기업 기업연금의 집중 피해가 예상된다.

실제 AIJ의 파탄 사태는 예고된 바다. 고율 당근의 장기 지속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2000억 엔의 거의 전부를 날렸다는 건 그만큼 부실 운용이 암암리에 진행됐다는 의미다. 2008년 금융 위기 땐 투자 환경 악화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운영 실적을 자랑하며 의혹을 샀다. 신용 평가사 설문 조사에선 인기 순위 1위까지 차지했다.

회사의 자료를 보면 2002~2011년 누적 이율은 250%에 달한다. 모두 거짓이다. 단순한 운용 실패가 아니라 교묘한 사기 냄새가 나는 이유다. AIJ 대표이사의 평소 행실도 운용 전문가이기보다 영업 맹신자라는 인상이 짙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라증권 출신으로 자금 유치에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사건 이후 먹고 마시기의 접대 전략으로 돈을 끌어왔다는 증언이 쏟아진다. 고가의 술집을 배회하며 상대방의 귀가 때는 승용차까지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운용 여부를 의심하면 완벽한 접대로 상대를 무너뜨렸다. 그러니 낮은 수익률과 높은 신탁 보수에도 불만을 표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당연히 접대비는 연금 적립금 중 일부다.



운용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아

관계 당국은 수익이 난 것처럼 꾸며 배당까지 하는 등 죄질이 나쁘다며 분개 중이다. 무엇보다 운용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 공분한다. 그도 그럴 게 AIJ 포트폴리오에는 ‘연금=안정 투자’의 상식이 처참히 깨진다. 조세 피난처의 펀드를 통해 위험하고 복잡한 대안 투자에 집중했다. 바꿔 말해 일본 당국의 감시망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은밀하게 움직였다.

상당 내용이 여전히 블랙박스에 쌓인 채라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2010년도 회사 보고서를 보면 파생 상품 거래액만 57조 엔에 달한다. 당시 계약 자산 총액(3894억 엔)을 감안하면 146배의 회전율이다. 선물·옵션거래의 과도한 쏠림 운용 혐의를 벗기 힘든 수준이다. 상식적인 업계 수준을 뛰어넘은 건 물론이다.

정부는 등록 취소를 결정했고 남은 건 폐업뿐이다. 피해 구제는 사실상 힘들다. 민간 계약인 탓에 “당사자끼리 협의해 해결할 문제”라는 게 공식 방침이다. 물론 2층의 후생연금이 일부 손실을 막아줄 수는 있다. 즉 3441만 명에 달하는 샐러리맨 가입자의 고통 분담이다. 그렇지 않아도 연금 재정 파탄 우려가 거센 가운데 손실까지 보전한다면 여론 악화는 명약관화다.

그렇다면 남은 건 모기업의 손실 보전이다. 다만 손실 보전은 가입 기업의 줄도산을 야기할 만큼 위험한 선택이다. 급부 이율을 못 맞춰 부족분을 회사 이익으로 벌충하다가 무너진 JAL의 악몽이 떠올라서다. JAL은 결국 급부 삭감을 결정했다. 이번에도 비슷하다. 가입자의 급부 삭감은 불가피하다. 수급자는 3분의 2의 동의로 삭감을 결정할 수 있지만 갈등이 만만치 않다. 가뜩이나 공적연금(1~2층)조차 줄어든다는데 기업연금마저 축소된다면 거센 반발은 당연하다. 더구나 피해자의 대부분은 기업 복지가 약한 중소기업 봉급생활자다. 노후 생활의 불안감과 불확실성이 한층 클 수밖에 없다.

당국은 대응 마련에 나섰다. 차관을 팀장으로 한 대책팀까지 꾸렸다. 특히 관료의 낙하산 문제가 불거지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관련 문제에 대한 정밀 조사에 착수했고 6월까지 운용 지침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감시 체계도 강화했다. 그간 외부감사는 선택이었고 보고 의무도 없었지만 외부감사와 포트폴리오 정보 공시를 강화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은 확대된다. 또 다른 AIJ의 냄새가 너무 짙게 퍼져서다. 처음엔 “운 나쁜 일부가 사기에 휘말려 연금을 날린 것”에서 사건 양상이 민감해지자 “내 연금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인식으로 확대되는 분위기다. 기업연금보다 두터운 공무원연금을 받는 관료가 사건에 개입했다는 점에서 국민 반발도 거세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겸임교수(전 게이오대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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