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엘피다 파산 보호 신청
198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 제조업의 승승장구는 2000년대 들면서 급격한 위기를 맞고 있다. ‘가이센(改善)’으로 상징되는 도요타의 대량 리콜 사태는 ‘일본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한국·중국·대만 등 아시아 신흥국의 성장과 선진국 경제의 부진이라는 대외 경제 양날의 칼, 여기에 대지진·고령화 등 계속되는 내부 리스크 속에 일본 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지난 2월 27일은 이러한 일본 기업과 제조업의 위기가 고스란히 드러난 날이다. 전 세계 D램 반도체 생산 3위 업체인 엘피다가 도쿄지방법원에 파산 보호 신청서를 제출한 것이다. 도쿄지방법원은 신청서가 접수되자마자 즉시 채권·채무를 동결했고 법정관리인을 선임했다. 일본의 파산 보호는 우리의 법정관리와 비슷한 개념이다. 채무 상환을 일시적으로 유예하고 자산 매각 등을 통해 기업을 정상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세계 3위의 D램 생산 기업이 부도 위기를 맞았다는 의미다.
엘피다는 2011년 4분기 기준으로 전 세계 생산능력의 17%, 공급의 20%를 점하고 있는 기업이다. 생산 공장은 일본 히로시마와 대만 타이중에 있는데, 타이중 설비는 대만의 파워칩과 공동으로 설립한 렉스칩(Rexchip) 소속이다. 히로시마 설비에서는 주로 모바일 D램을 주력 제품으로 생산하고 있다. 렉스칩은 개인용 컴퓨터(PC)용 D램을 주력으로 한다.
세계 3위 D램 기업, 부도 위기
엘피다가 파산 보호를 신청한 날, 사카모토 유키오 최고경영자(CEO)는 “1년 뒤에 30%의 점유율을 기록하겠다”며 기업 회생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엘피다의 앞날이 사카모토 CEO의 말대로 밝은 것은 아니라는 게 일본 내의 분위기다. 요미우리와 아사히 등 일본 내 주요 언론은 일제히 엘피다의 회생이 어렵다는 전망을 쏟아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등의 한국 기업이 과감한 설비 투자와 가격 경쟁력 확보를 통해 엘피다 등 일본 업체를 궁지에 몰았다는 분석이 주를 이뤘다.
일본 언론이 호들갑을 떠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엘피다가 오는 4월까지 갚아야 할 돈은 920억 엔(약 1조3000억 원)에 달한다. 총차입금 규모는 3581억 엔(5조2000억 원), 총부채는 4480억 엔(6조2000억 원)으로, 이는 일본 제조업체의 파산 사례 중 최대 규모다. 히로시마 공장을 계속 가동할 것이고 3월 말까지 운영자금도 충분하다는 게 엘피다의 설명이지만 누구도 이를 낙관하는 사람은 없다.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고 해서 당장 D램 생산을 중단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요 거래처의 이탈, 공정 전환 지연, 감산 등에 따른 타격은 불가피하게 됐다. 일부 거래처는 이미 한국 업체들로 옮긴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거래처 이탈과 감산은 그렇지 않아도 벌어진 한국 기업들과의 격차를 더욱 넓힐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파산 보호 신청 이후 엘피다의 행보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완전 파산 가능성이 낮다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엘피다는 일본의 유일한 D램 업체이고 당장 히로시마의 생산능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법원이 파산 보호 신청을 받아들이든, 파산 절차를 밟든 간에 엘피다의 자산 매각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때 히로시마와 대만에 있는 두 개의 공장이 주요 대상인데, 히로시마 공장을 매각하면 엘피다는 실제로 대만 기업이 돼 버리는 셈이다. 일본 내의 여론이 도시바의 엘피다 인수를 적극 지지하는 이유다.
사실 엘피다의 위기가 드러나기 전까지 전 세계 D램 시장은 미국(마이크론)과 일본(엘피다), 대만(난야 등)의 3각 동맹이 실현 직전에 와 있었다. 올 초만 해도 대만 언론은 “미국의 마이크론이 엘피다에 5만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며 “이는 난야·이노테라·파워칩·렉스칩 등 대만의 메모리 업체에도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지난 2월 3일 마이크론 전 CEO인 스티브 애플턴이 갑자기 사망하고, 이어 엘피다가 채무 위기에 처해 파산 보호 신청을 하는 등 악재가 겹친 상태다.
파산 보호 신청으로 마이크론과의 협상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일본 기업으로는 도시바가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도시바가 엘피다의 경영진 교체를 선결 조건으로 요구해 온 것도 마침 파산 보호를 통해 실현될 전망이다. 도시바의 엘피다 인수는 D램과 낸드(NAND) 기술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기업들에도 위협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일본 기업의 특성상 장기간에 걸친 구조조정 과정이 예상되고 도시바의 재무 리스크도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법원이 파산 보호 신청을 거부하고 인수·협력 기업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 엘피다가 문을 닫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되면 2009년 파산한 독일의 키몬다 이후 4년 만에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재편이 이뤄지게 된다. 1984년 인텔의 D램 철수, 1999년 LG전자와 현대전자의 합병, 2002년 NEC·히타치·미쓰비시의 반도체 부문 합작(엘피다 설립), 2009년 키몬다의 파산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이 한국 기업의 승리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2007년만 해도 키몬다는 전 세계 3위 D램 생산 업체였다. 하지만 70nm 이하 부문에서 원가절감에 실패하며 점차 나락에 떨어졌다. 파산 신청 후에도 제품 생산을 완전히 멈추지 않았지만 고객 이탈이 가속화되며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당시 키몬다의 파산으로 가장 큰 수혜를 봤던 엘피다가 이번에는 고스란히 4년 전의 상황을 재연하고 있는 셈이다.
엘피다 고객 한국 기업으로 이동
엘피다가 구조조정을 통해 회생하든, 파산 절차를 밟든 간에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이 가장 큰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업체들이 미국·일본·대만 업체들보다 수익이 좋은 이유는 모바일 D램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모바일 D램은 생산기술 확보 등 진입 장벽이 높고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이다. 세계적으로 모바일 D램 생산 가능 업체는 삼성전자·하이닉스·엘피다·마이크론밖에 없다. 마이크론은 모바일 D램보다 서버 D램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엘피다는 파산 보호 신청으로 동력을 잃은 상태다.
모바일 D램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등이 인기를 끌며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PC용 D램과 달리 스마트폰, 태블릿 PC 생산업체와 B2B로 거래하기 때문에 품질 못지않게 안정적인 수급이 중요하다. 기업 간의 신뢰가 거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엘피다의 생산 감소로 가장 큰 수혜를 볼 기업은 하이닉스다. 삼성전자가 이미 모바일 D램 부문에서 44%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엘피다의 고객들이 하이닉스 쪽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에 모바일 D램 세계 2위 자리를 엘피다에 내줬던 터다.
여기에 SK그룹의 하이닉스 인수는 그동안 설비 투자에 어려움을 겪던 하이닉스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다. 오너인 최태원 회장이 직접 대표이사로 나서며 하이닉스 부활에 힘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SK는 신주 발행 등을 통해 올해만 5조 원가량을 투자할 계획이다.
삼성전자 역시 갤럭시 시리즈 등 스마트폰, 태블릿 PC 시장의 호황을 기반으로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유지해 나갈 전망이다. 현재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의 전 세계 D램 공급 비중은 68%에 달한다. 반도체 치킨게임의 결과가 엘피다 파산 보호 신청을 계기로 결국 한국의 손을 들어주는 양상이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