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카메라 뒤의 아버지

연태흠 미디어트리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얼마 전에 아버지를 뵈러 경기도 일산에 있는 납골당에 다녀왔다. 아버지가 계시는 기독교관에 들어가면 찬송가 소리가 늘 흘러나온다. ‘성도(聖徒) 연규흥.’ 아버지 명패에 쓰인 글이다. 아버지는 독실한 불교 집안의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나 평생 교회의 문턱을 밟아 보신 적도 없는 분인데…. 위암으로 고생하던 아버지가 임종하기 전 어머니의 간곡한 바람에서 비롯된 일이다. 종교와 관련해 어릴 적 기억은 이렇다. 우리 집 식탁은 헌법에 쓰인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공간임을 여실히 보여줬다. 식사 때 아버지는 말없이 수저를 드시고 나와 어머니는 식전 기도를 위해 손을 모으고 누나는 성호를 긋고 식사를 한다.

아버지는 순화동 뒤쪽 공구상가에서 이모부와 함께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업을 하셨다. 부침도 있었지만 그래도 성실했기 때문에 크게 힘들었던 기억은 없다. 당신이 항상 성실함을 몸소 보여준 덕분에 아버지 하면 ‘성실’이라는 단어가 먼저 생각난다. 거슬러 올라가면 아버지의 성실함은 할아버지에게서부터 비롯됐다.

할아버지는 광복 전부터 독학으로 경찰공무원을 하셨던 분이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틈에서 경찰공무원을 하다 보니 지기 싫어 잠자는 시간을 쪼개 공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번은 아버지가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이가 깰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호롱불에 책을 읽으시다가 이불에 불이 붙어 집에 불이 날 뻔한 적도 있단다.

그런 분이니 자식들에겐 오죽했을까. 혹 4형제에게 말썽이라도 생기면(아들만 넷이었으니 말썽도 엄청 많았을 게다) 그중 가장 연장자에게 많은 벌이 내려졌다. 아버지는 엄한 할아버지 밑에서 그것도 집안의 장남으로 많은 걸 양보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이 적어도 당신 아들에게는 대물림되지 않기를 바랐는지 나는 아버지에게 한 번도 맞은 기억이 없다. 학창 시절 철모르게 대들 때도, 혹 마음 상하게 못되게 굴어도 모두 용서해 주셨다. 어쩌면 그저 당신 탓으로 돌리신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언젠가 본가에 가서 가족 앨범을 정리했던 적이 있었다. 혹 아버지와 내가 함께 찍은 조금은 다정한(?) 사진이 있으면 집에 가져다 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찾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 어디에도 아버지와 내가 나란히 찍은 사진이 없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늘 카메라 뒤에서 가족들 사진만 찍어 주셨지 정작 당신 사진엔 신경을 쓰지 않은 때문이었다. 가족들의 정이 묻은 사진을 담아 놓으시면서 당신은 카메라 뒤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심지어 가족 여행 사진에도 아버지가 담긴 사진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사진 한 장 한 장을 보면서 아버지가 카메라 뒤에서 우리를 보고 웃고 계시는 듯해서 가슴이 아려왔다.

지금 나 역시 내 자식들을 카메라 프레임 안에 넣어두고 셔터를 누를 때면 아버지 역시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셨던 아버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묵묵히 성실하게 살아가셨던 아버지, 말씀보다 행동으로 그 사랑을 알게 해주셨던 아버지가 사무치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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