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은행, 손해 감수 중앙은행에 예치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 시대’

글로벌 기업들이 불확실성에 몸을 사리고 있다. 유럽 재정 위기와 중국의 경착륙 우려 등으로 글로벌 경제 전망이 불투명해서다. 미국 기업들은 실적 전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유가와 환율의 향방을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럽 은행들은 현금을 안전한 유럽중앙은행(ECB)에 맡기고 있다. 안심하고 대출해 줄 곳이 없기 때문이다.

“환율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어 지역별 실적 전망치를 공개할 수 없다.” 미국 생활용품 업체 콜게이트는 지난 1월 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콜게이트가 지역별 실적 전망치를 내놓지 않은 건 13년 만에 처음이다.

콜게이트뿐만이 아니다. 최근까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에 편입된 기업 가운데 410개 기업이 4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올해 1분기 순이익 전망치를 공개한 기업은 86개로 20%에 불과하다. 미국 기업들이 느끼는 경기 불안감이 금융 위기 이후 최대 수준이라는 얘기다.

미국 기업 “실적 전망? 모르겠다”

금융 정보 제공 업체인 S&P캐피털IQ의 크리스틴 쇼트는 “기업들이 확실한 전망치를 내놓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있다”며 “특정 기업이나 업종을 떠나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전했다.

기업들이 실적 전망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원자재 가격과 환율 변동 폭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생활용품 업체 P&G의 존 몰러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콘퍼런스콜에서 “통상 환율이 불리하게 움직이면 원자재 가격이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여 리스크 상쇄 효과가 있었는데 올해는 둘 다 불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글로벌 기업들의 성장 동력이 된 신흥국 시장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있는 것도 기업들이 실적 전망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다. 씨티그룹의 웬디 니콜슨 애널리스트는 “신흥국 시장의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며 “기업들이 실적 전망을 내놓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요제프 애커만 도이체방크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설립 이후 보유 현금이 이렇게 많았던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도이체방크가 현금이 많은 이유는 불확실성 때문에 대출을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도이체방크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유럽 대형 은행들이 대출을 꺼리고 자금을 중앙은행 등 안전한 곳에 묻어두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31일 기준으로 도이체방크·소시에떼제네랄·BNP파리바·UBS·크레디트스위스·바클레이즈 등 8개 유럽 대형 은행들은 총 8160억 달러를 미국 중앙은행(Fed)과 ECB 등 각국 중앙은행에 예치했다. 이는 2010년 말 5430억 달러에 비해 50% 증가한 수준이다.

프랑스의 소시에떼제네랄은 중앙은행에 맡긴 돈이 440억 유로(578억 달러)로 1년 새 3배가량 늘었다. BNP파리바의 예치금은 580억 유로로 74% 증가했다. 장 롤랑 보나페 BNP파리바 CEO는 “지난해 하반기 (유럽 재정 위기에 따른)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신속하게 자금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원래 ECB에 돈을 맡기는 은행들은 거의 없었다. 금리가 낮기 때문이다. 하루짜리(overnight) 초단기 예금 금리는 연 0.25%에 불과하다. 이는 ECB가 최근 유럽 은행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3년 만기 대출금리인 연 1%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유럽 은행들이 1%의 금리로 빌린 돈을 0.25%의 이자를 받고 예금한 셈이다.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자금을 안전한 ECB에 맡기고 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대출 가뭄이 심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은행들이 가계와 기업에 빌려줄 돈을 중앙은행에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전설리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sl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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