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개 기업 지분 보유… 주총서‘제 목소리 내기’ 시동

‘350조 큰손’ 국민연금의 의결권 실험

올 주총 시즌의 최대 관심사는 국민연금이다. 주식시장에서만 62조 원을 굴리는 국민연금은 이미 상당수 우량 기업에서 1~2대 주주 자리를 꿰차고 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도 이건희 회장과 정몽구 회장보다 더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 방침을 분명히 한 국민연금의 행보에 재계가 잔뜩 긴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기업들은 국민연금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의결권 행사의 전제 조건으로 꼽는다.


지난 2월 10일 오전 10시 종로구 계동 보건복지부 회의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 위원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았다. 이날 안건은 SK그룹이 하이닉스를 인수한 후 여는 첫 임시 주주총회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하이닉스 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에 대한 찬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국민연금은 지분 9.15%를 보유한 하이닉스의 최대 주주다. 정부(2명)와 사용자(2명), 근로자(2명), 지역 가입자(2명), 연구기관(1명)에서 각각 추천한 9명의 위원 가운데 8명이 회의에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국민연금은 지난해의 주주 가치 훼손 이력을 이유로 최태원 회장의 SK와 SK이노베이션 이사 선임을 반대한 바 있습니다. 이번이라고 달라질 이유가 없어요. 오히려 반대 사유가 더 많아졌습니다. 확정판결이 나지 않아 반대할 수 없다는 건 지나친 법 형식 논리 아닙니까.”

“사안의 중대성을 따져 얼마든지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도 존중돼야죠. SK그룹에 인수돼 하이닉스의 주가가 오르고 직원들도 좋아하는데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무책임해요. SK그룹은 하이닉스에 23조 원을 투자했고 그룹 회장이 대표이사를 맡아 직접 챙기겠다는데 왜 그걸 막아야 합니까.”

찬성과 반대 측 입장이 날카롭게 부딪치면서 3시간 가까이 격론이 벌어졌다. 마라톤 토의 끝에 표결에 들어갔으나 찬성 3명, 반대 3명, 중립 1명, 기권 1명으로 찬반 의견이 갈리자 위원회는 하이닉스 이사 선임안에 ‘중립’ 의견을 내기로 의결했다. 사흘 후 열린 하이닉스 임시 주총에서 최 회장은 찬성 41.92%, 반대 15.89%로 무난히 이사에 선임됐다.
<YONHAP PHOTO-1130> <2011 국감>자료 살피는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서울=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전광우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19일 서울 송파구 신천동 국민연금공단에서 열린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서 답변자료를 살피고 있다. 2011. 9.19 uwg806@yna.co.kr/2011-09-19 12:14:12/ <저작권자 ⓒ 1980-201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 2명 사퇴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월 10일 열린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 회의 직후 정부 측 추천 위원인 지홍민 이화여대 교수와 김우찬 고려대 교수가 “중립 의견 결정은 국민연금의 기존 방침과 다른 것으로 재벌을 위한 편의 봐주기”라며 위원직 사퇴를 선언했고 주총 당일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파장이 일었다.

최근 대기업 규제 분위기와 맞물려 국민연금의 ‘어정쩡한’ 결정에 질타가 쏟아졌다. 대통령 자문 미래기획위원회 민간위원으로 활동하는 서정욱 법무법인 율려 변호사는 “국민연금이 3월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적절하게 행사하지 않으면 복지부 장관과 국민연금 이사장에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며 소송 참여 변호사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이번 사건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얼마나 예민한 논쟁을 부를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국민연금은 이미 주식시장의 큰손 중 큰손이다. 국민연금의 기금 자산은 2011년 11월 말 기준으로 346조 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17.9%인 62조 원을 국내 주식시장에서 굴리고 있다.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1100조 원)의 5.6%에 해당하는 규모다. 세계 최대 연·기금 중 하나로 주식 투자에 적극적인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캘퍼스)의 시가총액 비중이 1%에 채 못 미치는 것과 비교하면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시장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국민연금이 ‘어항 속의 고래’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국민연금은 2011년 11월 말 기준으로 국내 567개 기업에 투자하고 있다. 전체 상장 기업(1819개) 중 3분에 1에 가까운 기업의 주주인 셈이다. 이 가운데 5% 이상 지분 보유 기업만 157개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세계적으로 단일 연·기금의 시장점유율이 5%를 넘는 사례가 없다”며 “주주권 확대가 몰고 올 잠재적 파급효과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문제가 완전히 새로운 논란거리는 아니다. 국민연금이 보다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국민연금도 그동안 각종 제도적 정비를 통해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2004년 의결권 행사 지침을 처음 만들었고 2005년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설치했다.

2009년에는 유엔 책임투자원칙(UN PRI)에 가입해 의결권 행사 때 사회 책임 투자 요소를 고려해 판단한다는 규정을 추가했다. 작년에 개정된 의결권 행사지침 4조는 ‘장기적으로 주주 가치 증대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며 ‘환경, 사회, 기업 지배 구조 등 사회 책임 투자 요소를 고려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행사지침만 본다면 국내 연·기금 중 가장 앞선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이 지침은 지분 1% 이상 보유 주식에 대해서는 직접 운용 주식이든, 위탁 운용 주식이든 의무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한다.

존재감 없는 ‘자동 거수기’탈피

그동안 국민연금은 주주총회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는 ‘자동 거수기’ 노릇을 한다는 비판에 시달려 왔다. 주총 상정 안건에 반대표를 던지는 사례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지난해(1~11월) 국민연금은 538개 주총에 참석해 2138개 안건에 투표했다. 92.9%가 찬성표, 7.1%가 반대표였다. 흥미로운 것은 주총 안건 반대 비율이 매년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2년 1.2%에서 지난해 7.1%까지 치솟은 것이다.

국민연금이 브레이크를 건 것은 주로 이사 및 감사 선임과 관련된 안건이다. 지난해 이사 및 감사 선임안 반대가 88건으로 전체의 58.3%를 차지했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지난해 ‘주주 가치 훼손 이력’을 이유로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현대제철 이사 선임, 최태원 회장의 SK·SK이노베이션 이사 선임을 반대했다. 또한 김승연 회장(한화)과 이재현 회장(CJ오쇼핑)도 ‘과도한 겸임으로 충실한 의무 수행이 어렵다’며 반대표를 던졌다.

의결권은 주주로서 갖는 주주권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의결권은 경영진이 주주총회에 상정한 안건에 ‘1주 1표’ 원칙에 따라 찬반 투표를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다. 주주권은 이러한 의결권 행사뿐만 아니라 이사 후보 추천 등 각종 주주 제안, 주주 소송 참여, 경영자 정례 협의, 투자자 연대 등을 모두 포괄한다. 미국의 캘퍼스나 교직원연금기금(TIAA-CREF), 네덜란드 공무원연금(ABP) 등 세계적인 연·기금들은 주주 가치를 제고하기 위해 이러한 방식들을 모두 동원한다. 반면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와 지배 구조 펀드 운용 위탁 등만 활용한다.

지난해 4월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은 “대기업·중소기업의 동반 성장이나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 등의 문제에 대해 정부의 직접 개입보다 공적 연·기금이 보유한 주주권 행사를 통해 접근하는 것이 보다 시장친화적인 방법”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혀 재계를 벌컥 뒤집어 놓았다. 정부의 대기업 정책 수단으로 국민연금의 주주권을 활용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의결권과 관련된 논쟁을 들여다보면 몇 가지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 있다. 우선 찬성 측이나 반대 측이나 기금의 자산 가치를 높이기 위해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국민연금의 수익률은 전 국민의 노후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수익률을 1% 포인트만 끌어올려도 2060년 예상되는 기금 고갈을 10년 연장할 수 있다. 또한 양측은 의결권 행사는 필요하지만 경영권 간섭은 안 된다는 데도 한목소리를 낸다.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 위원인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과거처럼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팔고 떠나라’라는 월스트리트 룰에서 벗어나 주주권을 적극 행사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맞다”면서도 “하지만 공익적 목적을 너무 강조하면 부작용만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행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것이라는 의미다. 윤 교수는 기업 지배 구조 개선이나 투명성 제고는 이에 수반되는 부수적인 효과일 뿐이라고 본다. 그는 국민연금의 독립성과 전문성에도 의문을 나타낸다. 윤 교수는 “독립성과 전문성은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의 선행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주주권이 정권이나 정치권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다. 또한 이름 밝히기를 꺼린 한 국책 연구소 관계자는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로 기업 경영을 개선해 주주 가치를 높인다는 것은 국민연금이 해당 기업에 대해 기업보다 더 잘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며 “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의결권 행사 자문 서비스 필요

이에 대해 김우찬 교수는 “주주권 행사가 경영 참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반박했다. 기업 경영은 기본적으로 집행 임원들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주주는 1년에 한 번 개최되는 주총에서 극히 한정된 안건에 관해 이견을 개진할 뿐이라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주주권 행사 내용은 모두 공개되기 때문에 확실한 경우가 아니면 행사하지 못한다”며 “남용 우려는 기우일 뿐”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민연금은 기업별로 10% 이상 지분을 매입하지 않는다. 10%가 넘으면 ‘주요 주주’로 분류돼 공시 의무가 강화되고 6개월간 매매가 묶이기 때문이다. 이는 국민연금이 기업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아직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국민연금이 이사 선임을 반대한 대기업 총수들은 모두 큰 문제없이 이사에 선임됐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이 지분을 확대할 수 있도록 ‘10% 룰’을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김 교수는 “국민연금 지분이 10% 이상 커지면 기업들이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며 “국민연금도 다른 주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의견을 관철시킬 수 없어 적절한 균형 상태”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전문성을 보완해줄 수 있는 대안도 제시되고 있다. 국민연금이 제한된 인력으로 수천 건의 주총 의안을 일일이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해외에서는 기관투자가들을 위한 주총 의안 분석 서비스가 오래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JP모건에서 분리돼 1998년 설립된 ISS가 대표적이다. 이 업체는 세계 100여 개 이상 나라에서 2700개 이상의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의결권 관련 자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국민연금도 해외 주식에 대해 ISS의 자문을 받아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국내에도 이와 유사한 업체들이 등장하고 있다. 김우찬 교수, 장하성 고려대 교수 등이 참여하고 있는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10년 가까이 주총 의안 분석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거래소 한국기업지배구조원도 이 시장에 관심을 갖고 올해부터 코스피200 기업의 주총 의안을 분석한 자료를 서비스한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여전히 기업들에는 불편한 주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업들이 이러한 흐름에 대해 논쟁할 수는 있어도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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