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일본] 일본, 위기만은 아니다

부채는 ‘엄살’, 엔고는 ‘기회’

‘일본 경제 위기론’의 심증을 뒷받침하는 물증이 나왔다. 2011년 무역수지 적자 기록이다. 무역 대국의 자존심을 꺾은 31년 만의 적자 전환의 충격은 구체적이고 광범위하다. ‘일본 부도설’이 호사가들의 입에 끊이지 않는다. 다만 결과적으로 위기설은 기우(杞憂)일 확률이 높다. 염려만큼 위기 충격이 적을뿐더러 새로운 구조 전환 및 모델 구축을 위한 기회로 활용될 공산이 크다. 일본은 엄살 사회다. 예로부터 과장된 위기의식으로 현실의 악재 파고를 가뿐히 돌파해 왔다. 겉모습에 좌우·경도되기보다 일본 경제의 근원 파워와 돌파 능력을 살피는 게 한국엔 더 유리하다.
<YONHAP PHOTO-0306> ** FILE ** Security officers chat with staffs of the Bank of Japan at the gate of the Japanese central bank in Tokyo in this March 15, 2005, file photo. Managers at major Japanese companies grew more concerned about business conditions in March than they were three months earlier, a central bank survey showed Tuesday April 1, 2008. The index for large manufacturers' sentiment worsened to 11 in March, down from 19 in the previous survey in December, the Bank of Japan's closely watched tankan survey of corporate sentiment said. (AP Photo/Shizuo Kambayashi, FILE)/2008-04-01 10:32:53/ <저작권자 ⓒ 1980-200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일본대기업이 느끼는 경제상황지수인 단칸지수가 2분기연속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는 데 사진은 일본은행 입구(AP=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7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엔고로 달러 풍부…‘투자 입국’에 유리

무역 적자는 지진 탓이 크다. 지진 발생 전인 2010년 초만 해도 장밋빛 전망이 대세였다. 금융 위기 충격이 컸던 2010년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3.9%였다. 위기관리 우등생이라던 한국(6.1%)보다는 낮아도 미국(2.8%)과 유럽연합(1.8%)보다 높았다. 따라서 지진 피해가 복구될수록 무역 적자는 줄어들 확률이 높다. 무역 적자도 따지고 보면 망국론까지 갈 만한 것은 아니다. 무역 적자로 나라가 망한다면 미국·영국 등은 일찌감치 사라졌을 것이다. 단순한 수출입 양보다 채산성(실질 구매력)의 질이 더 중요하다. 오히려 무역 적자로 국민 후생이 좋아질 수도 있다.

무역 적자 고착화도 큰 충격은 아니다. 무역수지는 경상수지의 한 축이다. 소득수지도 1년 장사에 결정적이다. 2005년 일본은 오히려 소득수지가 무역수지를 추월했다. 무역 적자에도 불구하고 경상흑자 이유는 순전히 소득흑자의 기여(벌충) 덕분이다. 2009년 무역수지(4조 엔)는 소득수지(12조 엔)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즉 일본 경제는 이미 무역 대국에서 투자 대국으로 전환됐다. 물건 수출로 버는 이윤보다 돈을 투자·대출해 받는 배당·이자수익이 훨씬 많다. 소득수지는 증권 투자 수익, 해외 자회사의 배당금, 해외 근로소득 등으로 구성된다.

무역에서 투자로의 방향 선회는 이미 준비됐다. 2005년 ‘일본 21세기 비전’ 보고서에서 무역 적자 고착 유지를 예견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투자 입국(投資立國)’을 2030년 장기 비전으로 제시하며 시나리오와 대응 마련에 나섰다. 경제 축소, 관료 방해, 개방 지체, 불안 사회 등의 상황 회피를 위해 생산성 향상, 글로벌화, 공공개선 등 3대 전략을 내놨다. 뼈대는 제조업(무역수지)의 비중 축소와 금융업(소득수지)의 확대 강화다. 그러자면 경제 연대가 필수다. 양자 협상(FTA)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글로벌 수익 기반의 적극 조성이다.

2006년 통상백서는 더 구체적이다. 무역수지 적자 전환이 불가피한만큼 향후 ‘성숙한 채권국’으로 전환될 것으로 봤다. ‘성숙한 채권국’은 경상수지 발전 단계설 중 5단계로 경상수지 흑자 축소, 무역수지 적자화, 소득수지 흑자, 대외 순자산 잔액 확대의 단계다. 4단계(미성숙한 채권국)와의 차이는 무역수지 적자 여부로, 정확히 현재 단계다. ‘성숙한 채권국’은 미국·영국의 1980년대 상황이다. 따라서 최종 단계(채권 인출국)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하며 이때 관건은 소득수지 흑자 유지와 경상수지 적자 방어다. 즉 투자 입국으로의 변신이다.

투자 입국을 위한 환경 기반은 이미 갖춰졌다. 일본엔 돈이 많다. 엔고에서 보듯 달러가 물밀듯 들어온다. 불안과 엄살로 돈이 돌지 않아 내수 침체가 고착화됐을 뿐 보유 자산은 천문학적이다. 즉 손익계산서(무역수지)는 빨간불이지만 대차대조표(대외 순자산 잔액)는 파워풀하다. 엔고 평가손으로 규모가 좀 줄었지만 대외 순자산 잔액은 251조 엔(2010년)대를 기록 중이다. 2위 중국(167조 엔, 2009년)과 현격하다. 19년 연속 세계 최대 채권국이다. 또 엔고는 무역적자의 원흉이지만 해외 투자에는 절호의 찬스다. 해외 자산 저가 매입과 해외 거점 진출 비용에 우호적인 까닭에서다. 투자 입국을 지향하는 정부 후원은 일상적이다.

실제 엔고 이후 일본의 해외 인수·합병(M&A) 규모는 꾸준한 증가세다. 2011년 694억 달러로 전년 대비 78% 늘었다. 제조업 공동화와는 상충되지만 장기 전망을 봤을 때 엔고의 역발상 활용은 국부 창출에 긍정적이다. 다만 소득수지와 직결된 증권 투자에는 숙제가 있다. 대외 자산 투자 수익률이 낮고 분산투자에 취약해서다. 대외 자산 구성비 중 채권·외화 준비가 높은 대신 직접투자는 낮으며 투자 지역도 미국과 유럽연합 등 저금리 권역에 집중됐다. 개선 과제다. 이와 함께 환율 변동도 위험하다. 엔고에서 엔저로의 전환 우려다.

채권자 95%가 국민…재정 위기는 ‘과장’

무역 적자 말고도 일본 위기설의 근거는 많다. 대표적인 게 인구 변화와 맞물린 재정 파탄이다. 이것도 과장된 측면이 있다. 일본의 국가 부채는 GDP 대비 200%를 넘겼다. 문제는 향후 전망이다. 빚을 줄이자면 분모(성장률)를 높이거나 분자(부채)를 줄이는 게 유일하다. 분모 확대는 경제성장으로 세원 확보가 이뤄지면 되지만 어려운 장기 과제다. 분자 축소는 세출 감소로 가능하지만 사회보장비(106조 엔, 2010년)를 보면 어불성설이다. 예산 중 세수(40.5%)는 절반에도 못 미치고 되레 국채 발행(48.0%) 덕분에 살림이 꾸려지는 상태다. 증세(소비세 5%→10%)의 불가피성이다.

부채만 보면 디폴트가 나도 벌써 났을 수준이다. 그런데도 건장한 것은 일본 특유의 부채 구조 때문이다. 일본의 국가 부채 중 95%는 채권자가 국민이다. 국채 발행의 흡수처가 1500조 엔 안팎의 견고한 금융자산을 보유한 가계 부문이다. 빚을 가족한테 낸 격이니 남유럽 사태처럼 추심 염려가 적다. 가계로선 국채 수익률이 낮아도 안전한데다 마땅한 투자 대안조차 별로 없어 눈높이가 맞다.

이 밖에 제조업의 근원 경쟁력 저하도 자주 지적된다. 제조업의 성장 피로다. 일본적 경영 모델과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충돌로 고용 불안과 성장 한계의 동시 부각이 그렇다. 이 와중에 경합 국가의 제품 기술력 추격 격차는 줄어들고 소비시장과의 기술 괴리로 요약되는 갈라파고스 현상까지 빚어진다. 지진 이후엔 부품 조달 라인 변화로 동아시아 분업 구조마저 흔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조업의 근원 경쟁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세계 1위 제품이 셀 수 없이 많은 데다 글로벌 완제품의 필수 품목인 소재·부품 기여도와 환경·에너지 기술력은 독보적이다. 삼성전자가 소니를 이겼다고 잔치판을 벌일 일이 아니라는 정황 증거는 수두룩하다. 특히 환율 변동 대처 능력은 일류다. 장기간의 롤러코스터 엔화 변동 덕에 체득한 환율 내성은 흉내조차 힘들다는 게 중론이다.

한편 일본 위기설이 현실화되면 혐의는 경제보다 정치에 씌워질 개연성이 높다. 정치 부문만큼은 확실히 일본 경제의 딜레마다. 불확실성을 조장하는 정치 리더십 부재와 혼선적인 방향 갈등은 증세 논란에서처럼 심각한 불치병이다. 다만 일말의 기대감은 있다. 정권 교체에서 확인되듯 구태 타파와 정치 개혁의 민심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처럼 신흥 정치인의 출현이 예상돼서다. 강력한 방향 제시와 실천 능력이 검증되면 최근의 위기 탈피는 얼마든지 당겨질 수 있다.

일본 경제는 과거 3차례 기본 구조를 전환했다. 가공무역에서 시작해 풀세트 산업구조를 안착시킨 수입 대체화(1차)와 오일쇼크를 극복해낸 중후장대(重厚長大)에서 경박단소(輕薄短小)로의 산업 전환(2차), 1990년대 총수요 관리 정책을 통한 내수 부양(3차)이 그렇다. 이젠 무역 대국에서 투자 입국으로의 4차 구조 전환 시대다. 중상주의적 발상 전환과 축적 자산, 엔고 추세를 활용한 변신 시도다.

일본 부도설은 위기 기반의 가설이다. 다만 구조 전환 차원에서 본다면 위기 변수의 제반 근거는 기회에 더 근접할 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2012년 1월 27일자)’은 무역 적자에 따른 위기감을 ‘멋지지만 실효성은 없는(fabulous invalid)’이라고 평가했다.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비평가들의 우울한 예측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겸임교수(전 게이오대 방문교수) change4drea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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