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음악 칼럼니스트 사이, 유정우
그는 지난해 말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의 설렘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그에겐 좀 더 특별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 중인 바그너의 오페라 ‘리벨룽의 반지’를 보는 것이 여행의 첫 번째 목적. 보고 싶은 공연을 찾아 해외로 ‘원정’을 간 적이 한두 번도 아니건만 유난히 설레었던 건 평소 좋아하던 연출가가 ‘리벨룽의 반지’를 혁신적으로 그려낸 공연이었기 때문이었다. “1년에 세 번 정도 유럽 등에 나가 공연을 보고 도시를 여행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이 가장 즐겁다”고 말하는 그는 흉부외과 전문의다.그렇다고 공연을 보기 위해 해외에 가는 ‘사치스러운 취미’를 가진 사람쯤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그에게 공연 관람은 취미이자 ‘두 번째 직업’이다. ‘의사이자 클래식 음악 칼럼니스트’가 현재 그의 공식 타이틀이다. 2004년까지 근무하던 대학병원을 나온 것도 음악이 주요 이유였다. 당시 조금씩 명성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음악적 일에 대한 제안이 많아져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던 것.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고민을 거듭할 정도로 인생 최대의 반전이었지만 삶의 방향을 바꾼 후 그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행복과 즐거움이 찾아왔다.
클래식 음악이 바꿔 놓은 인생, 그 후
클래식 공연 마니아들 사이에 유정우란 이름은 이미 익숙하다. 1990년대 말 오페라 동호회 활동을 하며 음반평 등을 쓰기 시작한 그는 2000년대 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는 예술의 전당에서 3년 넘게 하고 있는 정기 강좌 ‘유정우의 오페라 살롱’을 비롯해 KBS 라디오 ‘신성원의 문화읽기’, ‘황정민의 FM대행진’, ‘장일범의 가정음악’과 KBS 1TV ‘명작스캔들’ 등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며 방송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처음 외부 활동을 하기 시작한 건 풍월당 박종호 선생님의 영향이 컸어요. 박종호 선생님이 주관한 ‘광장클럽’이라는 오페라 애호가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당시 우리나라 오페라 쪽에서 한가락 한다는 사람들은 다 모여 있었죠. 이후 음악 평론가 장일범 씨 등과 함께 동호회 활동을 하다 보니 또 다른 ‘업’이 생긴 겁니다.”
오페라라는 장르는 대중성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가 ‘두 번째 직업’에 열심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클래식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들, 이유 없는 반감을 가진 사람들, 어렵게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오페라 역시 영화나 대중음악처럼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부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요.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뭔가 하나라도 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데 정작 전공자들은 공연하랴 대학에서 강의하랴 바쁘다 보니 대중적인 강의를 할 시간적 여력이 없어요. 설령 한다고 해도 일반인들에겐 어려운 수준이고요. 그런데 저는 아마추어 강사잖아요. 저 역시 오페라를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에 대중들의 갈증을 잘 알고 있죠. 제 역할은 오페라의 저변 확대를 위한 ‘가이드’라고 생각해요. 막연하고 어려운 오페라가 친숙하고 즐거워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거죠.”
그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역시 흉부외과 의사인 그의 아버지는 1960년대 덴마크와 스웨덴 등 유럽으로 유학을 가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이후로도 학회 참석 차 유럽에 갈 일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유럽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고 아들에게도 유럽의 자연과 도시, 문화에 대해 생생한 사진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유럽 문화를 접하면서 클래식 음악이 좋다는 걸 알게 된 아버지는 음악을 잘 모르면서도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음반들을 모으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 음반들을 듣다 보니 제 적성에 맞더라고요. 중학교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죠. 그 시기는 라이선스 음반이 많이 나오던 때라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다양한 음악을 누릴 수 있었어요.”
다양성이 중요한 시대,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
그때부터 유럽에 대한 동경도 시작됐다. 검증된 대가들의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와 동시대의 음악가들에게 특히 관심이 많았던 그는 직접 현장에서 공연을 보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했다. 그 꿈이 실현된 건 대학 2학년 때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40일간 학생 단체 유럽 여행을 간 그는 다양한 공연과 콘서트를 접했고 그 후 외국의 오페라나 일반 클래식 잡지들을 보며 전 세계 공연 동향을 캐치했다.
대학 졸업 후 수련 기간 동안에는 해외에 나가 공연을 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틈나는 대로 찾아다니고 학회 차 해외에 갈 때는 꼭 챙겨 보는 등 클래식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 스스로 농담 삼아 “음악 하듯이 공부에 매달렸으면 세계적인 석학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다.
현재 의사라는 직업과 음악 칼럼니스트 사이에서 완벽히 균형 이룬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전공자로서 가지는 창작과 생산의 고뇌를 비켜 가면서도 좋아하는 음악과 오페라를 통해 돈까지 벌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라는 것. 사실 한동안 그도 음대 진학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취미 삼아 오보에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호흡법을 배우기 위해 성악 레슨을 받았는데, 그때 내 목소리가 좋은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바로 주제 파악했습니다(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이다 싶어요. 예술가는 고통이 따르는 길인데 저처럼 태평한 성격의 소유자가 하기에는 외로웠을 것 같아요. 더불어 정말 좋아하는 일이 전공이 됐을 때는 지금처럼 즐길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요.”
클래식과 오페라는 결과적으로 그의 삶을 더 풍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무엇보다 의사로서만 살았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음악 외적으로도 풍성해졌다.
“공부 1등, 1등 의사를 목표로 했다면 이뤘을 수도 있지만 ‘딴짓’을 하면서 인생이 더 행복해졌어요. 제가 지인들에게 자식한테 공부시켜 봐야 소용없다고, ‘딴짓’을 많이 해야 한다고 자주 얘기하는데 그 안엔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 있죠. 저 역시 아버지가 공부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이고요. 아쉬운 게 서양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의 주제가 굉장히 풍부한데, 우리나라는 어떤 모임이건 간에 대부분 대화의 주제가 자기 분야 이야기 아니면 골프, 자식 교육 얘기죠. 다양성이 중요한 시대잖아요. 물론 누군가는 일 자체가 취미인 사람도 있겠지만 저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일만 하는 사람들과 저 같은 사람들이 소통되는 사회여야 한다는 점이고요.”
이쯤에서 오페라에 관심 있는 초보자들을 위한 추천 리스트를 물어봤다. 그는 “오페라의 원조인 이탈리아의 오페라부터, 그것도 잘 알고 있는 아리아부터 시작하라”고 말했다. 가장 대중적인 오페라야말로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작품들이라는 것. 그가 말하는 ‘오페라의 ABC’는 베르디의 ‘아이다’, 푸치니의 ‘라보엠’, 비제의 ‘카르멘’순이다. 여기에 ‘라트라비아타’, ‘리골레토’, ‘토스카’, ‘투란도트’ 등이 추가되면 좋다.
“클래식 음악은 엄숙하고 경건하고 고급스러운 것이라는 벽은 일부 클래식 애호가들이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죠. 오페라가 어렵게 느껴지지만 스토리를 보면 다 사람 사는 이야기고, 근본적으로는 ‘막장 드라마’예요. 그냥 일할 때 운전하면서 배경음악(BGM)처럼 흘려 들어보세요. 뭐든지 익숙해지면 아름답게 느껴지게 돼 있어요. 아는 만큼 들리는 게 아니라 듣다 보면 알게 됩니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