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혁신이다 37
기술원에서 임명한 최고관계(소통)책임자(CRO)들이 항상 관계사들을 순회하며 ‘시급한 기술’을 찾고 묻기 시작했다. 과제에 없는 것도 인원을 차출해 연구하고 도와줬다. 그렇게 해서 나온 성과 중 하나가 삼성전기의 주력품인 적층 세라믹 콘덴서(MLCC)다. 삼성전기의 재료 기술이 약해 고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개발에 착수해 성공한 사례다. 요즘 뜨고 있는 발광다이오드(LED)도 관련사에는 기술자가 부족했고 기술원에서 오랜 시간 연구해 온 분야였다. 오늘날 삼성전기 LED 기술력의 동기가 기술원에서 시작된 것이다.그 뒤 4세대 통신을 연구할 때도 40개 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을 엮어 공동 개발하는 커뮤니티를 기술원 주도로 만들었다. 하나의 클러스터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기업이 경쟁을 이겨나가기 위해 현시점과 목표를 오픈하면 대학이나 연구 기관들이 함께 연구해 시너지를 창출하는 게 좋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비슷한 사례로 NTRM(National Technology RoadMap)이 있다. 과학기술부가 주도해 만든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지도다. 이 사업은 삼성 반도체 사업의 미래 방향과 일맥상통했는데, 바로 기술원의 로드맵을 벤치마킹했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국가나 큰 방향은 같다. 국가의 기술이 어디로 갈 것인지 일관성이 없으면 모든 연구 주체들이 시너지를 낼 수 없다. 선진국들은 국가적으로 이를 만들어 조율하고 통일한다. 기술원이 로드맵의 중심이 되고 이를 국가적으로 발전시켜 한 방향으로 시너지 내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나”하는 것이 삼성의 건의 내용이었고 이를 과학기술부에서 받아들였다. 당시 CRO 중 한 명인 이석환 박사가 주도한 프로젝트였다.
삼성그룹 기술의 플랫폼
삼성그룹 모든 기술의 플랫폼화를 표명한 곳이 기술원이었지만 1999년 부임 당시만 해도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삼성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멋진 창업 비전은 온데간데없었다. 심지어 “기술원 문을 닫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고 조직원들도 자부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문제는 바로 ‘비전’이었다.
기초연구는 연구 자체가 좋아 모인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자기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을 개발해 존경과 명예를 얻는 것이 모든 연구원들의 꿈이다. 그런데 사업자들은 기존 기술의 문제점을 개선해 달라거나 당장 눈앞에 있는 기술 등 낮은 수준의 요구를 할 수밖에 없다. 관계사가 요구하는 목표를 달성한다고 하더라도 학회에서 발표할만한 수준이 안 되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예를 들어 2세대 통신 특허의 기술 표준은 이미 선진국들 차지였다. 관계사는 당장 이 기술이 필요해 기술원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연구원들로서는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어차피 3만 명 중 1000명이다. 무슨 큰 변화가 있겠나’하는 것이 부임 당시 연구원들의 마인드였다. 조직을 뜯어고칠 계기가 절실했다.
“우리야말로 선대 회장의 초심·비전을 따라보자. 원천 특허, 세계적 표준, 기업 가치를 뜯어고치는 기술 외에는 연구하지 말라. 앞으로는 이 세 가지만 묻고 요구하겠다. 아닌 것은 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며 “3세대 통신을 연구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구동성으로 “이미 선진국이 다 해 뚫고 들어갈 데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번엔 “그렇다면 4세대가 있지 않느냐”고 되묻자 “누구도 시작하지 않아 뭔지도 모른다”는 게 아닌가. ‘이거다’ 싶었다. 누구도 시작하지 않은 기술에 우리가 처음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4세대 통신 태스크포스팀을 조직했다. 5년 후 삼성은 전 세계 4세대 통신의 선두주자가 됐다. 한국인은 예부터 도전적인 목표를 향해 힘을 모으면 무서운 저력을 발휘한다. 반면 후퇴 기미가 보이면 지리멸렬해지기 마련이다. 2세대 통신 기술에 불평불만이 많던 사람들이 4세대를 화두로 던지자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급기야 팀 구성 1년 만에 4세대 통신의 핵심인 안테나 특허를 낼 수 있었다. 긍정의 마인드만 쌓이면 엄청난 역량을 발휘하는 한국인의 특성이 고스란히 나타난 대목이다. 리더는 이렇게 평범한 과제가 아니라 가슴이 뛰는 목표를 줘야 한다.
높은 목표 한편으로는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그 일환으로 창업 이후 1998년 말까지의 기술 과제 130여 건을 분석했다. ‘우리가 개발한 기술이 정말 삼성에 도움이 됐는지’를 파악하고 관계사까지 찾아다니며 조사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긍정적인 답변은 18%에 그쳤다. 이러니 관계사에서 “기술원은 뭐하는 조직인가”라는 민망한 질책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기술원 내부에선 ‘모두 성공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고객의 가치와 기술원의 눈이 이렇게 달랐다. 관계사는 적군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기술원 사람들은 원천 유원지에서 뱃놀이하듯 연구·개발하고 있으니 누구도 좋아할 리 만무했다.
2001년에는 미래기술연구회를 발족했다. 앞으로 융합 기술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란 인식에서 시작된 일이다. 새로운 융합은 다양한 기술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들이 서로 교류하고 이해해야 시너지가 나온다고 생각했다. 삼성의 미래도 융합 기술에 달려 있었다.
기술 생태계가 답이다
미래기술연구회 주도로 한국 최고의 전문가들을 회원으로 초청해 강연을 여는 등 교류에 나섰다. 나노·바이오·통신·컴퓨터, 심지어 건축이나 사회 전문가까지 20명 정도를 조직화했다. 당시 시작한 연구회 활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삼성전자의 미래 리더들도 함께했는데, 당시 전무였던 이재용 사장도 연구회 멤버였다. 기술원의 기술 전문가들, 삼성전자의 최고 기술경영자들이 함께 참여해 이들과 교류했다.
서로 듣고 배우는 자리였던지라 참여한 사람 모두가 굉장히 좋아했다. 멤버들 모두가 자신의 분야에서 1등이었지만 다른 분야는 잘 몰랐다. 교류 자체를 굉장히 반가워하고 그런 장을 마련해 준 삼성에 고마움을 표시한 이유다.
삼성으로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대표들의 지혜와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꾸미지 않아도 대한민국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교류로 한국이 융합 기술의 꽃을 피우는 데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모임은 일종의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요즘 동반성장·공생이 화두인데, 산업화 초기만 해도 모회사만 잘되고 하청 업체들은 수단을 제공하는 시대였다. 그야말로 하청 관계다. 그러다 ‘협력회사’로 이름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동반 성장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전자산업으로 본다면 단순히 몇몇 기업의 성장뿐만 아니라 전자산업 전체를 뒷받침하는 큰 생태계(클러스터) 전체를 올바르게 육성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 구심점에 삼성 같은 큰 기업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생태계를 바탕으로 모기업이 크고 이를 통해 협력사도 발전하면 개인과 중소기업이 강한 시스템이 저절로 이뤄진다. 미래기술연구회도 융합 기술의 리더들이 서로를 이해해 생태계를 만들자는 개념이었다. 오늘날의 공생·동반성장과 같다.
예를 들어 엔지니어를 육성하는 공대와 테크니션을 만드는 실업계 고교 그리고 작은 중소기업부터 중견기업까지 생태계 속에서 잘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하는 게 대기업의 역할이 돼야 한다. 이제는 혼자서만 지속 성장할 수 없다. 4세대 통신 연구를 시작할 때도 5개 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대학당 10~20명 정도의 연구 인력이 참여하는 대형 산학협력 클러스터를 만들었다. 이른바 4세대 통신 생태계다. 오늘날 한국이 통신 강국의 위상을 쌓을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이 산학협력 생태계였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