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공무원’


어릴 때부터 나는 ‘아빠’라는 단어를 써 본 적이 없다. 다른 친구들이 아빠라고 부를 때 나는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빠와 아버지라는 단어는 어감상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아빠는 왠지 샤프한 소프트웨어 같은 느낌이고 아버지는 묵직한 하드웨어적인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빠는 자상하고 친근한 느낌이 드는 반면 아버지는 왠지 가부장적인 가정에서의 무뚝뚝한 보스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빠와 아들의 관계보다 왠지 먼 느낌이 든다.

필자의 아버지도 단어에서 오는 느낌 차이처럼 아빠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생일날 또는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준비한다든지,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그런 현대적인 아빠는 분명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주변의 평범한 부자 관계가 그렇듯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버지와 마주 앉아 많은 대화를 나눠 본 기억도 별로 없다. 그냥 아버지와 필자는 서로 믿으면서 묵묵히 지켜보는 그런 관계였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자녀를 낳아 기르다 보면 비로소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과 역할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는 첫째 아이를 기르면서도 그런 생각을 별로 못했던 것 같다. 첫째 아이는 별다른 일 없이 잘 자랐고 또 그래서 특별히 부모로서도 어려운 역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아이들은 이렇게 적당히 뒷바라지하면 잘 커 가는 구나’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필자가 40대 중반에 둘째를 낳아 늦둥이를 키우다 보니 새삼스럽게 아버지에 대한 여러 가지 느낌들이 새록새록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필자의 아버지가 단순한 아버지가 아닌 현대적인 아빠였다는 생각이 든다. 직업 특성상 밤늦게 퇴근하는 일이 많은데, 요즘 10개월 된 딸이 기어 나와 필자를 웃으면서 맞이한다. 스트레스가 싹 없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를 안고 집 안을 한 바퀴 돌면서 같이 늦게까지 놀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의지도 생기고 젊은 아빠들이 해 주는 모든 것을 해 주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늦둥이와 있다 보면 문득문득 아버지가 나한테도 똑같이 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막연한 생각이 아니다. 물론 갓난아기 때의 추억은 기억할 수 없지만 좀 더 자라서 아버지와 손잡고 동물원·놀이동산 등을 다니던 기억도 새삼 들고 같이 집 앞에서 야구를 하면서 자상하게 공 던지고 받는 방법을 알려주던 것과 학교 가기 전에 연필을 일일이 깎아 주시던 일 등이 30여 년이 지난 이제야 생각이 난다.

늦둥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병원을 들락거리면서 수술실까지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아이에 대한 미안함, 애틋한 감정과 동시에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가 병실에서 울 때 필자도 몰래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부모의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꼈다. 필자가 대학원 시절에 이번 늦둥이와 같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실에서 온갖 병수발을 들어주던 아버지의 모습도 그때야 기억이 났던 것이다.

아버지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공무원이셨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세태가 어지러워도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자식들에게 진정한 아빠의 모습도 보여 주면서 살고 싶다.


이창목 우리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