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 리더를 만나다] “지배 구조를 알면 기업의 미래가 보이죠”
입력 2012-02-03 17:34:13
수정 2012-02-03 17:34:13
강성부 동양증권 채권분석팀장
지난해 말 우연히 손에 넣은 552쪽짜리 두툼한 보고서를 읽고 작성자가 궁금해졌다. 동양증권에서 낸 ‘2012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라는 보고서다. 한국에서 가장 예민한 주제 중 하나인 기업의 지배 구조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경제개혁연대 같은 곳에서 만든 보고서를 보고 있는 게 아닌지 가끔 착각이 들 정도다. 시민 단체가 사용하는 거친 단어 대신 객관적인 숫자와 그래프가 주를 이루지만 그 안에 담긴 논리와 문제의식은 결코 만만치 않다.
보고서는 기업 지배 구조와 관련된 최근 이슈를 다루는 전반부와 국내 80개 그룹의 지분 구조, 후계 구도 등을 수록한 후반부로 구성돼 있다. 일반인이 볼 수 있는 내용은 전반부 중 100쪽 분량뿐이다. 지분 구조 등이 담긴 나머지 부분은 기관투자가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개된다.
기관투자가의 필독서가 된 보고서
더 놀라운 것은 이 범상치 않은 보고서가 온전히 한 개인의 노력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강성부(40) 동양증권 채권분석팀장이 처음 지배 구조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3년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우증권에서 신용분석 업무를 맡게 된 강 팀장은 한국 기업의 신용 등급이 소속 그룹이 어디냐에 따라 대부분 좌우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신용 평가에서 소속 그룹이 그처럼 중요한데도 개별 그룹의 지배 구조를 분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때부터 혼자 복잡한 지분 관계를 추적해 그룹별 지배 구조도를 그리는 지루한 작업을 시작했다. 2005년 그렇게 모은 자료를 묶어 첫 기업 지배 구조 보고서를 냈다.
기관투자가들의 반응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한국 기업 현실에서 개별 그룹의 지배 구조 변화와 후계 구도의 향방은 투자 결정에 꼭 필요한 핵심 정보에 해당한다.
“2005년부터 매년 한국 기업의 지배 구조 보고서를 내고 있어요. 기관투자가들을 만나면 책꽂이에 1~2년 치 보고서가 거의 꽂혀 있어요. 펀드매니저에게 가장 인기 있는 ‘책’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서 보람을 느끼죠.”
처음에는 강 팀장 혼자 모든 일을 했지만 이제는 팀원 8명이 함께 작업한다. 매년 일정한 테마를 정해 보고서를 구성한다. 보고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지배 구조도는 최신 데이터를 반영하고 표현 방식을 개선해 매번 새롭게 그린다.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해관계가 얽힌 예민한 주제를 다루다 보니 잘못하면 특정 그룹을 헐뜯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는 가치중립적이어야 해요. 한쪽으로 지나치게 경도되면 안 되죠. 처음부터 투자자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보고서를 내기 시작했어요. 시민 단체들처럼 소위 ‘재벌 개혁’을 주장하려는 게 아닌 거죠.”
올해 보고서의 주제는 굴 파기(Tunneling)다. 이는 계열사들이 대주주 일가나 지주회사가 더 많은 지분을 보유한 회사로 이익을 몰아줘 부가 이동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눈에 띄지 않게 땅굴을 파서 회사의 이익을 은밀하게 뽑아 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즘 논란이 되는 일감 몰아주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급보증이나 채무인수 같은 신용 제공, 대여금이나 펀드를 통한 직간접적인 유동성 지원, 자산을 싼값에 넘겨주고 비싸게 사오는 행위, 증자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전환사채(CB) 발행 시 권리 포기 등도 굴 파기의 한 형태다.
“강준구 싱가포르 난징공대 교수의 연구 결과을 보면 굴 파기를 많이 당하는 회사는 주식시장에서 저평가됩니다. 투자자 입장에서 주가에 부정적이기 때문에 굴 파기에 반대하는 거죠.”
그동안 굴 파기에 자주 활용된 3대 산업은 시스템 통합(SI)과 광고, 물류 업종이다. 많은 대기업에서 계열사들이 벌어들인 이익이 굴 파기를 통해 이들 3대 업종 계열사로 상당 부분 이전된다. 문제는 과거 같은 ‘화끈한’ 굴 파기가 이제는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당장 올해부터 일감 몰아주기 과세가 시행된다. 정부에서 입법 예고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 시행령 개정안은 특수 관계 법인 매출 거래 비율이 30%를 넘는 기업은 변칙 증여를 받은 것으로 간주해 증여세를 부과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해당 기업의 지분을 3% 이상 보유한 지배주주와 친족이 세금을 내야 한다. 지난해 16년 만에 개정된 상법도 오는 4월부터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간다. 개정 상법은 일감 몰아주기나 사업 기회 유용으로 이사나 제3자가 얻은 이익을 회사의 손실로 추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올해 기업 지배 구조 대격변 온다
강 팀장은 국내 기업의 지배 구조가 올해 대격변을 예고한다고 진단한다. 과거 그룹 체제를 지탱해 온 순환 출자 구조는 1970~1980년대 압축 성장에는 기여했지만 이제는 경제력 집중의 주범으로 간주된다. 게다가 많은 대기업들이 3대 경영권 승계라는 숙제를 앞두고 있다.
한국은 상속세율이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최고 상속세율이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인 26.3%를 훨씬 앞지른다. 최초 50%로 출발한 대주주 지분율도 2대에서 25%, 3대로 가면 12.5%로 하락해 경영권 유지가 만만치 않다. 여기에 일감 몰아주기 과세 등으로 굴 파기까지 막혀가는 형국이다.
“당근과 채찍을 함께 줘야 해요. 일감 몰아주기 과세도 당근 없이 채찍만 가하는 방식이 되면 대기업들이 또다시 편법을 선택하고 그에 따라 ‘재벌’에 대한 반감도 커지는 악순환이 벌어질 수밖에 없어요.”
강 팀장이 생각하는 대안은 일감 몰아주기 과세를 하는 대신 상속세율을 낮춰주는 ‘타협’이다. 경영권 승계의 길을 일정 부분 터주자는 것이다. 그는 기업들에도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열린 자세를 주문한다. 사회적 요구에 대한 선제적 대응만이 기업의 가치를 높이고 생존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강 팀장은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고, 멀리 가고 싶으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며 “이제 한국 기업도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함께 가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약력:1972년 경남 함양 출생.
1999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2001년 서울대 경영학 석사. 2001년 대우증권 리서치센터 크레디트 애널리스트. 2004년 동양증권 채권분석팀 크레디트 애널리스트. 2010년 동양증권 채권분석팀장(현).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