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지금도 끝나지 않은 응원


나는 2년 전에 아버지와 영원히 이별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아버지를 느낄 때가 많아 이별했다는 걸 잊곤 한다. 아버지는 1919년에서 2010년까지 92년간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을 지낸 세대의 일원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리더스다이제스트를 국내 최초로 출판하셨고 고향인 경기도에 중·고등학교를 설립, 운영하셨다. 은퇴 후에도 화수회와 은퇴목회자를 위한 재단 운영 등에 관여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일을 놓지 않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셨다.

“너희는 배움이 크니 사회를 위해 잘 쓰이는 사람이 되어라”는 식사 기도 때마다 이르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대학 졸업과 함께 결혼하고 출산한 이후에도 일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도 아버지의 이런 당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른두 살에 창업한 이후 단 한 번도 그 어떤 만류나 걱정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나의 계획을 늘 궁금해 하고 특히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때 그 누구보다 먼저 손을 들어 주셨다. 1999년 인터넷 접속률을 측정하는 회사를 창업했을 때 그 회사의 주력 상품을 이해하기 힘들어 하면서도 새 회사에 대한 기대와 함께 격려해 주셨다.

창업 후 지난 24년간 어려운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한국에서 여성 최고경영자(CEO)로 살아가는 일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어려움의 연속이었지만 문제에 직면하게 됐을 때 언제나 ‘아버지라면…’이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사업 초기 어느 날인가 조사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며 강하게 항의하던 사람과 전화로 격론을 벌이던 중 상대방으로부터 “이 나쁜 기집애야”라는 말을 들었다.

저녁에 아버지께 일렀더니(?) “그 사람 참 고맙군. 우리 딸이 아직 소녀란 말이지 않니?” 하시는 게 아닌가. 아버지의 해학에 분했던 마음이 다 사라지며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그 후론 어떤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씩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받은 가장 큰 상속은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참을 수 없는 탐구심이 아닌가 싶다. 친구들은 나를 호기심 천국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호기심과 탐구심이야말로 내 DNA에 깊이 새겨주신 소중한 유산이다.

80세에 파킨슨병을 얻고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정리하며 보여주신 모습 역시 강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87세였던 2006년 고향의 토지가 도시화로 가격이 오르자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라며 많은 부분을 한국방정환재단에 기부하셨다. 당황해 하는 가족들이 있었지만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에게도 이 재단에 기부하라고 명령(?)하셨다. 나도 이제 서서히 은퇴 이후를 준비해야 하는 나이가 됐다.

‘제3의 인생을 어떻게 의미있게 맞을까?’를 계획하는 요즘도 아버지는 여전히 중요한 나침반이 되신다. 한국방정환재단은 방정환 선생의 뜻을 되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오랜 바람이기도 한 다음 세대를 건강하게 하는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아버지의 사명을 이어 세상을 밝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인재들을 지원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싶다. 오랜 세월 병상에 계셨던 모습은 사라지고 언제나 밝은 미소로 바라봐 주시던 아버지의 응원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아버지 늘 감사합니다. 당신의 딸은 오늘도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

이상경 (주)현대리서치 대표이사·한국방정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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