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으로 나를 가르치시다

아버지는 1981년 61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그때도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6·25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평양 근처에서 살던 우리는 1948년 아버지가 미리 남하하셨고 그래서 이산가족이 되었다가 전쟁 막바지인 1953년 1월 어머니와 같이 남하한 가족은 부산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2?3년간 같이 살다가 다시 아버지는 어머니와 서울로 이사하셨고 나는 조부모님·고모님과 같이 생활하다가 1955년에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로 이사를 와 가족이 모이긴 했지만 사업을 하던 우리 집은 사업장 사정으로 가족이 같이 지내기가 힘들어 당시 거의 부모님과 같이 지내지 못하다가 고등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5~6년 정도 같이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군에 갔고 돌아와 3년 정도를 가족과 같이 보낸 다음 결혼했고 직장 관계로 광주광역시로 이사하게 됐다. 이렇게 계산하면 부모님과 같은 지붕 밑에서 산 것은 10년이 채 안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요사이 문득문득 아버지가 생각나곤 한다. 아버지의 사랑을 처음으로 느낀 것은 4·19혁명 때였다. 사업 때문에 별로 아버지와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한 관계로 아버지는 그냥 생부로서 그냥 아버지였다. 그런데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4·19혁명을 겪는 과정에서 관훈동에 살던 나는 아침을 먹고 종로2가로 구경을 나갔다가 파고다공원(탑골공원) 앞까지 갔을 때 종각4거리에서 경찰 백차가 총을 쏘는 바람에 길가 어느 집에 숨어들었다가 해가 떨어지고 어슬어슬할 때에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집 골목에 들어서는데 앞에서 마주 오던 아버지가 부리나케 달려와 다짜고짜 따귀를 때리셨다. 평소에 말도 많이 하지 않고 자상한 눈빛만으로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였었는데 눈에서 불이 번쩍 날 정도로 따귀를 맞은 것이다.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맞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걱정이 나를 때리신 만큼 크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군을 제대한 후 아버지의 곁에서 사업을 배우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많은 의견 충돌이 있었다. 내게 긴 말을 하지 않는 아버지도 한 번은 “너는 일을 할 때 너무 따지니, 따지지 말라”고 하셨다. 젊은 사람이 생각하는 정의와 원칙은 항상 기성세대가 하는 일들이 정의롭지 못하고 요샛말로 쿨(cool)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에 대한 이론적인 반박을 하면 아버지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나를 바라보시곤 하셨다.

지금에야 그 눈빛을 이해할 것 같다. 이제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를 지나 인생을 경험해 보니 사리 판단을 제대로 했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에게 대들던 젊었을 때의 내 모습이 얼마나 얕은 지식에 폭 좁은 시야와 짧은 생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는지 알 것 같다. 나보다 인생을 2배 이상 살면서 수백 명의 종업원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세상의 많은 변수를 혼자의 몸으로 짊어지고 버티고 계셨던 모습을 이제는 내가 힘들고 고달플 때면 충분히 이해가 되고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말없이 행동으로 살아가시던 아버지에 비해 지금도 나는 젊었을 때의 근성을 못 버려서, 아니면 교수라는 직업상 많은 말을 해서인지 말로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침묵으로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알고는 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참을성이 없는 행동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아버지만큼 인내와 너그러움으로 살아갈지 계속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김정필 조선대 미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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