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날아갈라’… 정치권 극도로 몸 사려
‘감기약 슈퍼 판매’가 또다시 암초에 부딪쳤다. 슈퍼마켓이나 편의점 등 약국 외 장소에서 감기약을 판매하려면 먼저 약사법부터 고쳐야 한다. 현재 정부가 개정안을 마련해 입법 절차를 밟고 있지만 이번에는 정치권의 거센 반대에 직면했다.정부가 우호적인 여론을 등에 업었지만 선거철을 앞두고 6만여 약사들의 눈치를 보는 정치권 때문에 정작 국민들의 편익은 뒷전이 돼 버린 모양새다.
지난 9월 27일 오전 청와대에서는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 오른 47개 안건 중에는 내년도 예산안과 함께 약사법 개정안도 들어 있었다. 두 안건 모두 가결됐다. 개정안은 10월 초 국회에 제출될 전망이다.
전날인 9월 26일 여의도에서는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를 포함한 최고위원 회의가 개최됐다.
홍 대표는 이날 회의에서 “지난 주말 전국여약사대회에 다녀왔다”며 “약사법 개정안을 살펴보니 국민의 편의성에만 중점을 두고 국민의 안전성을 외면하는 법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놓고 약사회를 편들겠다는 듯한 발언이다.
약사대회 갔다 온 홍준표, “개정안 반대”
그는 이어 “감기 기침약의 주성분에는 에페드린이 포함돼 있는데 이는 일종의 한외마약으로 히로뽕 성분”이 들어 있다며 “이런 감기약을 슈퍼에서 판매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했다. 역시 약사들의 반대 논리를 되풀이한 것이다.
국무회의에서 약사법 개정안이 통과된 직후 열린 보건복지부 국정감사에서도 갓 취임한 임채민 장관이 이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여야 할 것 없이 약사법 개정안을 추진하는 복지부에 대해 거센 질타가 이어졌다. 의원들은 증인으로 출석한 김대업 대한약사회 약국외 판매 저지를 위한 투쟁전략위원장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노골적으로 약사회 편을 들기도 했다.
주승용 민주당 의원은 “임 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장관이 되면 (약사법 개정안에 대해) 약계와 충분히 협의하고 일반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며 “그러나 취임하고 난 후에는 입법 절차를 그대로 진행하고 있다”고 따졌다.
같은 당 소속인 박은수 의원 역시 “이명박 대통령도 후보 시절에는 약사대회에 참석해 약국 외 판매가 필요 없다고 약속했는데 갑자기 약사법 개정을 반대하던 복지부 장관(진수희 전 장관)에게 사무관처럼 일한다고 호통 치는 모습을 보면서 ‘민주주의 국가가 맞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종합편성채널의 광고 시장 확대를 위해 일반 의약품 슈퍼 판매를 졸속 처리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고 주장했다.
곽정숙 민주노동당 의원은 “현재 건강보험을 적용받는 품목이 슈퍼에서 판매되면 본인 부담금이 증가하고 건강보험 재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임 장관은 “법안은 국회에서 결정해야 할 사안이기 때문에 법안을 토대로 여러 논란이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관계 기관과 함께 충분한 검토와 논의를 할 것”이라고 재차 약속했다.
여야 의원들이 이처럼 반발하고 나선 것은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결집력이 강한 6만여 약사들의 표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골목 약국들이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며 “대다수 국민들의 편익을 고려해 법안 통과에 찬성하더라도 표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지만 반대한다면 최소 약사 표만큼은 반드시 챙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향후 여론의 향방이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실제 복지부가 지난 6월 ‘의약품 재분류’를 통해 국민들의 의약품 구입 불편을 해소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국민들의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결국 이 대통령의 지시로 법 개정이 재추진되기도 했다. 여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정치권의 속성상 현 정부가 꼭 불리한 처지에 놓인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호기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