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쓰나미’…30년 ‘윈텔’ 아성 흔들

반도체 시장 ‘격변’내막

“오늘 아침 일찍 우리는 처음으로 차기 윈도 버전이 인텔·AMD·ARM의 시스템온칩 아키텍처를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는 윈도를 위한 모든 새로운 하드웨어(HW), 새로운 반도체 회사가 가능한 한 많은 범위의 단말기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 엔비디아·퀄컴·텍사스인스트루먼트(TI)가 ARM 아키텍처에 기반한 칩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5일 밤 7시 라스베이거스. 미 가전쇼(CES 2011)가 열리는 컨벤션센터에서 1시간짜리 연설을 맡은 스티브 발머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경영자(CEO)가 폭탄 선언을 했다.

지난 30년간 이어졌던 이른바 ‘윈텔(윈도+인텔)’ 진영의 붕괴를 알리는 선언과 다름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발머는 이 대목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연설 끝자락에 끼워놓고 발표해 버렸다. 하지만 이는 30년간 전 세계 그 어느 정보기술(IT) 전시회에서도 볼 수 있었던 윈텔만의 독무대가 사라졌다는 것을 선언하는 순간과도 같았다.

윈텔, 즉 윈도로 대표되는 컴퓨터 운영체제(OS)의 대명사 MS와 X86 계열의 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서(CPU)의 대표 주자 인텔 간 동맹은 햇수로 30년이나 된 끈끈한 것이었다. MS를 이처럼 변하게 만든 것은 윈텔 동맹이 더 이상 최근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라는 모바일 혁명에 대응하기 힘든 체제라는 배경을 깔고 있었다.

세상은 IT 단말기 시장이 바뀌어 기존의 인텔칩에 윈도를 깔면 되는 PC 위주의 시장에서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등이 함께 공존하는 시대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실제로 시장 조사 기관 IDC는 지난해 스마트폰 판매 대수(1억20만 대)가 처음으로 PC 판매 대수(9200만 대)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PC 시대가 저문 것이다. 그 자리로 어느 새 스마트폰과 태블릿 PC가 들어와 휩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텔은 어쩐 일인지 이 모바일 기기용 칩 시장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 경쟁에 가세한 칩 제조업체들은 낮은 전력소비량을 과시하며 모바일 단말기용 칩을 잇달아 내놓았다. 이날 새로 친구 삼았다는 세 회사, 즉 퀄컴·TI·엔비디아 등 세 회사가 만든 칩을 적용하는 단말기 회사에서 MS의 OS를 사용해 주길 바라는 게 MS의 심정이었다. 물론 인텔도 거명되긴 했지만 과거 같은 관계가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세계 최고의 PC용 CPU 공급사인 인텔은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인텔은 2010년 사상 최고의 실적을 기록했고 2011년 1분기 들어서도 그러한 성과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투자자들도 뭔가 낌새를 알아챈 듯했다.

불안의 근원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즉 기존의 PC가 아닌 포터블형 기기, 즉 모바일 기기였다. 그것은 1분기 결산 결과 42년 내 최고의 분기 실적이 나온 인텔에 ‘주가 제자리’라는 시장 반응을 이끌어냈다. IT 시장에서 30년간 CPU 시장의 황제였던 인텔에 대해 사람들이 불안과 의구심 섞인 시선을 교환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부쩍 커진 ARM의 존재감

조짐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인텔은 30년 긴 세월을 황금의 나뭇가지가 늘어진 그늘 아래서 긴장하며 왕좌를 노리는 자객들을 경계해 왔던 터. 자객들이 칼을 갈고 있어도 CPU 제국의 황제 인텔은 이를 미처 못 봤거나 보고도 지나친 듯했다.

불온한 기운은 2007년 처음 나타났다. 포스트 PC 시대를 맞아 최초로 윈텔의 성들을 위협해 온 적은 실리콘밸리 초창기 시절부터 창업자 빌게이츠와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GUI)로 아웅다웅했던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었다. 잡스는 과거 모토로라 IBM과 함께 AIM(Apple+IBM+Motorola) 동맹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파워 칩 동맹을 맺은 적이 있었다.

이번엔 아이폰이란 자체 개발한 최신·최강의 무기로 윈텔의 아성들을 하나 둘씩 함락시켜 가고 있었다. 윈도폰이란 MS의 OS도 스마트폰 시장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

잡스의 여의봉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폰은 어느새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의 최강자로 우뚝 서 있었다. 애플은 지난 1993년 뉴턴이라는 개인 휴대단말기(PDA)를 시장에 내놓고 실패했을 때와 또 다른 모습이었다. 뉴턴은 당시 미미해 보였던 ARM라는 회사의 칩 설계 지식재산권(IP) 기반의 OS를 쓰면서 친해져 있었다.

그 애플이 2007년 아이폰이란 이름의 스마트폰을 내놓으며 모바일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아이폰·아이패드 OS에는 기존 OS의 대명사인 윈도 대신 애플의 iOS가 쓰였다. 게다가 잡스는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이 단말기들의 칩도 자사에서 직접 설계하도록 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ARM이 제공한 코어프로세서 디자인에 기반한 A4칩을 사용하고 있었다. 컴퓨터용 프로세서를 CPU라고 부르는 반면 휴대전화용 프로세서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즉 AP로 불렀다. 잡스는 ARM 칩 설계 라이선스를 사서 A4칩이라는 아이폰용 AP를 만들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제 애플은 컴퓨터 회사이자 통신 단말기 회사, 그리고 OS 회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단말기 칩을 만드는데 사용한 디자인 라이선스를 제공한 옛 친구 ARM과의 우정은 더욱더 끈끈하게 이어졌다. 이 폰은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을 극대화해 주는 신기한 도구였다.

윈텔을 위협하고 나선 또 다른 상대는 구글이었다. 모바일 시대를 예견한 이 검색 제왕은 모바일 확산을 통해 모바일 검색 확산을 촉진하고자 했다. ‘검색 제왕’이란 별명을 달고 있는 이 경쟁자는 일견 인텔을 위협하는 역할과 무관할 듯 보였다.

하지만 검색에만 관심 있는 듯 도무지 속내를 비치지 않는 이 회사는 돌연 ‘안드로이드’라는 우주의 별이름 비슷한 수상쩍은 스마트폰용 OS를 발표했다. 사람들은 리눅스 기반의 이 OS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 이 검색 제왕의 신무기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가장 잘나가는 회사이자 인기 절정인 아이폰·아이패드용 OS까지 넘보는 경쟁자로 부상했다.

이들은 ARM사의 아키텍처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칩의 혈통으로 보면 반인텔 전선의 친척뻘이었지만 시장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경쟁자였다.

안드로이드 OS의 등장은 아이폰이 발표된 다음 해에 이뤄졌다. 이 OS는 프로요·진저브레드를 거쳐 허니콤으로 진화했는데 흔히 영국의 20년 된 칩 디자인 라이선스 회사인 ARM의 디자인을 사용한 칩과 어울렸다. 갑자기 ARM이란 회사의 존재감이 부쩍 커져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사람들은 구글과 이 칩 디자인 회사 간의 보이지 않는, 그러나 새롭고 거대한 협력 체제를 새로운 동맹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동맹군 이름은 부르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암드로이드(ARM+안드로이드), 또는 지암(Google+ARM)으로 불렀다. 전력소비량이 적고 칩 연산 및 그래픽 성능은 기존 노트북에 맞먹는 특성이 사람들에게 회자됐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제조업체들에는 암드로이드 연합군이 단연 인기였다. 2010년 전 세계 휴대전화 업계는 애플과 안드로이드폰 쇼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건 모두가 애플과 암드로이드와 모바일 OS 및 칩에서 시작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계 1위의 휴대전화 업체인 노키아는 스마트폰 분야의 실적 부진으로 ‘노키아 쇼크’, ‘노키아 추락’ 등의 제목으로 전 세계 지면에 오르내리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세계 3위의 휴대전화 업체 LG도 스마트폰 책임자가 스마트폰 전략 부재를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야 했다. 인텔은 2011년 3월 들어 아난드 찬드라 셰커 모바일담당 부사장의 책임을 물었다. X86 계열의 칩을 만드는 AMD의 수장도 예외는 없었다. 이 회사 이사회는 스마트폰 시대에 대응하지 못한다며 사실상 더크 마이어 사장을 문책해 쫓아냈다.

2011년 들어서 그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세계 최대의 휴대전화 회사 노키아는 7000명을 감원한다고 발표했다. 반면 2007년 삼성전자가 거절한 구글의 안드로이드폰 제작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승승장구하던 스마트폰의 다크호스 HTC는 세계 2위 삼성전자 수익의 3분의 1인 5000억 원 규모의 순익을 내면서 직원을 1000명 늘리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모바일 칩 시장의 무한 경쟁

이처럼 태블릿과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모바일 혁명을 맞은 반도체 시장은 인텔과 반인텔, 즉 ARM 아키텍처에 기반한 칩 시장으로 양분돼 격전을 예고하고 있다.

시장 상황은 급박하게 전환되고 있다. IDC는 올 초 ARM이 5년 내 PC 시장에서 인텔을 추월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고 5월 초 LA타임스는 내년도 미국 시장의 태블릿 수요가 노트북을 추월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스마트폰 시장인 미국의 보급률이 20%에 불과한 점, 최근 나온 한 보고서가 5년 내 일반 휴대전화(피처폰)가 없어진다고 전망한 보고서 등은 모바일 칩 시장으로의 급속한 변화 기류를 읽게 하기에 충분하다.


앞으로 태블릿과 스마트폰을 아우르는 모바일 칩 두뇌의 경쟁, 즉 AP 칩 경쟁에서는 기존 강자인 퀄컴과 엔비디아, TI, 그리고 이 분야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삼성의 1GHz 듀얼코어 칩 엑시너스의 행보도 주목해 볼만하다.

이 구도를 보면서 기존의 PC 강자 인텔과 AMD가 과연 어떤 숨겨놓은 무기로 모바일 시장에서 신흥 강자들과 대결 구도를 펼칠 것인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모바일 혁명을 보는 포인트 가운데 하나로 기존 PC용 CPU의 종가인 인텔과 AMD가 신흥 칩 강자들에게 쫓기는 형국이 된 ‘전세 역전’ 상황의 추이를 놓칠 수는 없다.

결국 신흥 강자들의 돋보이는 약진을 가져온 모멘텀은 바로 ARM과 안드로이드다. 이러한 개방형 모바일 혁명의 추세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 세계 칩 기업들이 경쟁 속에서 뛰어난 저전력, 고속 처리 연산 칩을 내놓는 것도 향후 모바일 혁명 확산의 열쇠가 될 전망이다.

모바일 혁명의 실체를 보여줄 하드웨어 대중화는 항상 이를 뒷받침해 온 칩 업체들의 설계 능력 경쟁의 결실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재구 ZD넷 국제과학 전문기자 jklee@zd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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