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미국 시장에서 고전하는 영국 슈퍼마켓 체인들
영국을 대표하는 슈퍼마켓 체인인 테스코(TESCO)가 미국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는 테스코가 최근 몇 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서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 온 것과 비교해 보면 의외의 결과다.지난 2월까지의 영업 실적을 집계한 결과 테스코는 미국 시장에서 한 해 동안 1억8600만 파운드의 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극심한 경기 침체 속에서도 전년 대비 12% 성장이라는 알짜배기 실적을 기록한 테스코로서는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수익을 미국 시장에서 잠식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테스코 미국 매장이 처음 문을 연 것은 2007년 말이었다.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네바다와 애리조나 등 서부 지역 3개 주의 소비자들을 노리고 미 대륙에 첫발을 내디뎠다. 더욱이 유행의 흐름이 빠르기로 소문난 할리우드와 라스베이거스 등에 매장을 빠르게 늘려나갔다.
중소형 동네 매장 … 접근성·가격 ‘승부수’
미국 진출 전략의 초점은 신선한 식품을 싼값에 소비자들에게 제공한다는 것. 매장 규모도 대형 마트나 백화점 스타일을 지양하고 중소형 동네 매장을 넘어서지 않는 범위로 잡았다. 매장 평균 면적은 월마트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고 판매대를 낮게 설치해 접근성을 용이하게 했다.
매장 이름도 이에 걸맞게 ‘프레시 앤드 이지(Fresh & Easy)’로 정했다. 파란색 계통에 붉은색을 섞어 쓰는 테스코의 전통 로고 컬러와 달리 프레시 앤드 이지는 매장과 직원들의 유니폼을 온통 연두색으로 디자인했다.
테스코 성공 신화에서 효자 노릇을 했던, ‘클럽카드’로 불리는 포인트 누적 시스템도 도입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광고나 e메일 리스트 등 마케팅 비용도 최소화했다. 대신 최대한 가격에 부담을 주는 요인을 줄여 소비자들에게 되돌려 준다는 점만을 강조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처음에 이러한 변화를 낯설어 했다. 수만 개의 다양한 아이템을 파는 월마트식 대형 매장에 익숙한 사람들은 3500개 정도의 아이템만을 취급하는 중소형 매장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후 3년간 프레시 앤드 이지는 꾸준히 매장을 늘려갔다. 현재 3개 주에만 175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외형만으로 보면 테스코는 미국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작 대차대조표에 나타난 실적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 원인을 둘러싸고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초점은 영국 기업인 테스코가 세계 최고의 소비수준을 자랑하는 미국 소비자들이 갖지 못한 새로운 것을 제공했는가에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정답은 ‘아니오’에 가까워 보인다. 사실 이러한 우려는 이미 테스코가 미국 서부 지역에 매장을 내기 시작한 직후부터 미국 쪽 유통 전문가들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첫째, 테스코가 미국 유통시장 환경에 맞춰 ‘프레시 앤드 이지’의 성격을 특화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이다. ‘프레시 앤드 이지’가 값이 비싸더라도 신선한 고급 식품에 초점을 맞춘 것인지 아니면 대량생산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겠다는 것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신선하고 싸다’는 점을 내세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발상은 취지는 좋았지만 미국 시장에서 소비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효과적 영업 전략이 될 수 없었다는 분석이다.
유럽 브랜드가 미국에서 성공한 것은 대부분 고소득층을 겨냥한 럭셔리 브랜드가 많았다는 지적에도 귀 기울여 볼 만하다. 재규어나 페라리 같은 자동차 브랜드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이는 미국 식료품 소매시장의 기존 판도와도 관련돼 있는 문제다. 미국에는 이미 홀푸드 마켓, 웨그만, 세이프웨이 스토어 등 다양한 식료품 전문 슈퍼마켓들이 분화된 형태로 소비자들을 분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신규 매장 입점 전략에 좀 더 세심한 고려가 필요했었다는 지적도 있다. 테스코와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슈퍼마켓 체인들이 타깃 고객들의 유형에 따라 특화 전략을 쓴 것과 달리 테스코의 입점 전략에는 그러한 전략적 고려가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막스 앤드 스펜서, 세인스베리도 미국서 철수 전력
예를 들어 가격이 비싸더라도 신선한 유기농 제품을 선호하는 고소득층을 노리는 제품들을 취급하는 매장이라면 부유층 밀집 지역을 파고들어야 하고, 실용적인 저가 제품 판매 점포라면 중산층 이하 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을 노려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매장을 찾는 고객들의 주머니 사정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어떤 소비자층의 기호에 맞게 판매 및 디스플레이 전략을 세울 것인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유통업계 전문가들은 그러나 최소한 고객층이 뒤섞여 있는 매장이라고 하더라도 ‘우선 고객’이 누구인지는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한다.
테스코가 거대한 미국 시장을 상대로 고전하는 것은 이 회사가 지난 10여 년 동안 추진해 온 과감한 해외시장 개척 노력에 비춰보더라도 다소 의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해외시장 개척은 테스코가 영국, 나아가 글로벌 유통 시장에서 강자로 떠오른 디딤돌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테스코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소매 유통 업계에서 절대 강자가 아니었다. 막스 앤드 스펜서(Marks and Spencer)와 세인스베리(Sainsbury’s)에 이어 늘 3위에 머물러 있던 테스코가 10년도 안된 1990년대 후반 이후 영국 내에서 업계 1위 자리에 올라선 이유로 전문가들은 과감한 해외 매장 개척을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테스코는 현지화뿐만 아니라 이른바 ‘역(逆)현지화’ 전략을 통해 해외 현지의 영업 방식 중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은 영업 방식을 다른 지역의 시장에 재도입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테스코는 미국 시장 진출에 앞서 사전 시장 조사에 그 어느 나라보다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진다. 마켓 서베이어들을 미국 소비자들의 가정에 아예 상주시켜 가며 이들의 쇼핑과 소비 패턴을 하나하나 기록하기도 했다.
테스코가 미국에서 벌이고 있는 실험이 성공으로 이어질지, 실패로 막을 내릴지 판단하기는 물론 아직 이르다. 그러나 막스 앤드 스펜서나 세인스베리 같은 영국 슈퍼 체인들이 지난 10년 동안 모두 미국 시장에서 쓴맛을 보고 철수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테스코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막스 앤드 스펜서는 1988년 브룩스 브러더스(Brooks Brothers)로부터 155개의 매장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가 2002년 3분의 1 가격에 되팔고 미국 사업에서 철수했다. 또 세인스베리도 미국 북동부 뉴 잉글랜드 지역의 현지 업체를 인수했다가 2004년 들어 월마트와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되팔아 버렸다.
테스코의 미국 내 영업 실적 부진이 미국 경기 침체라는 시기적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미국 측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대로 브랜드 전략의 실패 때문인지를 판단하는 데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테스코는 영국 슈퍼 체인들이 보여준 미국 잔혹사의 기억 때문에 두고두고 괴로워해야 할 것 같다.
성기영 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