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영원한 승자는 없다…무한경쟁 포문

IT 거인들의 최후 전쟁, 삼성전자 vs 애플

매출액 기준 세계 1위 정보기술(IT) 기업 삼성전자. 순이익과 시가총액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독주하는 애플. IT의 시장을 둘러싼 두 거인의 글로벌 패권 전쟁이 막을 올렸다. 먼저 애플이 포문을 열었다.

삼성전자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복잡 미묘하다. 애플은 삼성전자의 적이자 아군이다.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혈투와 수조 원대의 부품 거래가 공존한다. IT 거인들의 불안한 동거는 이제 종지부를 찍은 것일까.

지난 4월 21일 삼성전자 서초 사옥에 이건희 회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2008년 완공된 이 건물 42층에 그의 집무실이 있지만 이 회장이 직접 나와 업무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초동으로 옮기기 전 14년 동안의 태평로 사옥 시절에도 이 회장은 회사로 출근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남동 자택이나 집무실 겸 외빈 접견실인 승지원에서 일했다.


행동반경 넓히는 이건희 회장

이날 이 회장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쉽게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이례적인 ‘첫 출근’에 담긴 메시지는 뚜렷했다. 올 69세로 해외 언론에서 ‘은둔의 제왕’으로 부를 만큼 좀처럼 회사를 찾는 법이 없던 이 회장이 갑작스럽게 출근을 결정한 것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다.

며칠 전 애플이 특허권 침해 등을 이유로 삼성전자를 제소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애플은 삼성전자의 주력 모델인 갤럭시S와 갤럭시탭이 자사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디자인을 베꼈다고 주장하는 소장을 4월 15일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북부지방법원에 제출했다. 첨단 기술 업계에 특허를 둘러싼 소송전이 비일비재하지만 애플의 ‘도발’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이 회장이 서초동에 첫 출근한 4월 21일 삼성전자는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일본 도쿄 법원, 독일 만하임 법원 등 3곳에 애플을 특허 침해로 정식 제소했다. 애플의 소송 카드에 맞소송으로 정면 대응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조짐은 있었다.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는 3월 초 아이패드2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모방꾼(Copycat)’으로 삼성전자를 한껏 깎아내렸다. 그는 지난해 10월 실적 발표 행사에서도 “7인치 태블릿은 출시되자마자 이미 사망한 상태가 될 것”이라며 갤럭시탭을 겨냥해 독설을 쏟아내기도 했다. 허풍과 자기과시가 흔한 IT 업계에서도 이처럼 노골적인 반감 표출은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이번 맞소송전이 요란한 시작과 달리 교차 라이선스 형태로 싱겁게 끝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IT 업계의 수많은 특허 소송이 지루한 법정 다툼 끝에 결국 서로 타협점을 찾는 것으로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플이 법원에 낸 소장을 꼼꼼히 살펴보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애플은 이미 HTC와 모토로라 등 안드로이드 진영의 스마트폰 업체들과 특허 소송을 벌이고 있다. 이번에 애플이 삼성전자를 제소한 내용은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HTC와 모토로라 소송은 기술적인 특허 침해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삼성전자 케이스는 디자인 특허와 트레이드마크(상표권), 트레이드 드레스(상품 외장)를 모두 포함하는 광범위한 내용이다.


오랫동안 준비된 ‘일격’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트레이드 드레스다. 애플이 소송에서 제기한 16개 항목 중 6개가 이와 연관돼 있다. 트레이드 드레스는 상품의 외관, 혹은 느낌을 포괄하는 비교적 새롭게 등장한 지식재산권 보호 장치다.

허리가 잘록한 코카콜라 병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애플은 갤럭시S의 둥근 모서리 처리, 페이지가 움직여도 위치가 고정돼 있는 스프링보드 등을 문제 삼았다. 아래 피스가 위 피스에 완전히 들어가는 투피스 상자와 박스 전면에 그려진 제품 전면부 그림, 상자를 열 때 바로 보이도록 제품을 지탱해 주는 트레이 등도 트레이드 드레스 침해 사례로 꼽혔다.

애플이 핵심 기술도 아닌 트레이드 드레스를 집요하게 문제 삼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과거 피처폰 시장과 비교해 단말기 숫자가 줄어들고 전략 모델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피처폰 시장은 다양한 디자인과 스펙의 제품을 쏟아내 그중 1~2종의 히트작을 건져 올리는 구조였다. 반면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디자인과 사용자 경험 전반에서 자사 라인업을 관통하는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관건이다.

애플은 포장 박스나 외관 디자인이 소비자들이 인식하는 애플의 정체성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애플은 박스 디자인에만 수백만 달러를 쏟아 붓고 있다.


애플이 트레이드 드레스로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희생자는 공교롭게도 한국 업체들이었다. 애플은 지난 1999년 아이맥의 반투명 디자인을 모방한 혐의로 삼보컴퓨터의 미국 합작법인 이머신즈와 퓨처파워, 소텍 등을 제소해 승소한 바 있다.

애플은 지난 4월 낸 소장에서 “삼성은 독립적인 제품 개발을 하는 대신 애플의 혁신적인 기술과 뛰어난 사용자 인터페이스, 우아하고 차별적인 제품과 패키지 디자인까지 비굴하게 복제했다”고 발끈했다.

하지만 디자인에 대한 애플의 높은 자긍심이 이번 소송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믿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소송 타이밍부터 예사롭지 않다. 문제가 된 갤러시S와 갤럭시 탭은 작년 6월과 11월 각각 출시됐다.

일찌감치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는 의미다. 이는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는 애플이 소송을 낸 지 불과 6일 만에 ‘통신표준기술’로 애플에 맞불을 놓았다.

삼성전자가 문제 삼은 것은 데이터 전송 시 전력 소모를 감소시키고 전송 효율을 높이는 고속 패킷 전송 방식(HSPA) 통신 표준 특허 등 3가지다. 아이폰 출시 후 이를 수없이 연구했을 삼성전자가 애플의 특허 침해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애플이나 삼성전자나 이미 축적된 무기고에서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 셈이다. ‘기술의 삼성전자’와 ‘디자인의 애플’의 정면 승부다.

전성훈 하나대투증권 애널리스트는 “애플의 소송은 안드로이드 진영에 대한 공세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스마트폰 시장에서 구글의 공개 운영체제 안드로이드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안드로이드의 시장점유율은 작년 1분기 10%에서 지난 1분기 35%로 3배 가까이 뛰었다. 안드로이드는 내년 전체 시장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며 주도적인 스마트폰 운영체제로 자리를 굳힐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반면 애플의 iOS는 지난 1분기 19%로 소폭 상승에 그쳤다.

삼성전자는 안드로이드 진영의 가장 극적인 성공 사례다. 이 회사는 애플 아이폰의 대항마인 갤럭시S의 인기에 힘입어 4.3%(2010년 1분기)에 불과하던 스마트폰 시장점유율을 불과 1년 만에 10.8%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애플에 안드로이드의 부상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안드로이드는 공짜인데다 강력한 인터넷 기업인 구글의 간접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애플이 정작 안드로이드를 개발한 구글이 아니라 이를 채용해 제품을 만드는 삼성전자나 HTC를 타깃으로 소송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 애널리스트는 “구글은 안드로이드를 공짜로 배포하기 때문에 소송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이를 제품화해 돈을 버는 제조업체에 소송이 집중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 경제 전문 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애플의 최근 소송 공세는 “공짜인 안드로이드에 가격을 부여하려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애플의 파상적인 소송전에 맞서려면 제조사들은 많은 돈과 에너지,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한다. 애플이 만약 하나라도 승소하면 똑같은 권리를 다른 제조사에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전 애널리스트는 “모든 안드로이드 업체들이 애플과 소송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궁극적으로는 구글이 나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폰·아이패드 ‘두뇌’ 에서 납품

스티브 잡스의 ‘모방꾼’이라는 비아냥거림은 삼성전자의 아픈 곳을 건드린다. 삼성은 무엇이 잘 팔리는지 지켜보고 이를 재빨리 모방해 제품화하는 추종자 전략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시장을 선도하는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2009년 1167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해 미국 휴렛팩커드(HP), 독일 지멘스를 제치고 세계 1위 IT 기업에 올랐다.

하지만 순이익 규모나 시가총액에서는 덩치가 훨씬 작은 애플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박리다매식 사업 모델에서 벗어난 아이폰으로 40%의 이익을 챙기는 애플이나 윈도로 70%의 마진을 내는 마이크로소프트를 꿈꾸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창조적 혁신이 필수다.

애플의 소송 제기가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삼성전자와 애플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애플은 삼성전자의 강력한 라이벌이자 최대 고객이다. 애플은 매년 6조 원이 넘는 모바일 칩과 메모리를 삼성전자에서 구매해 간다.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두뇌에 해당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A4와 A5는 삼성전자의 만년 골칫거리였던 시스템LSI사업부를 살린 일등 공신이다. 시스템LSI사업부는 지난 1분기에 2조32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체 반도체 부문 매출 9조1800억 원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시스템LSI사업부 매출 중 60~70%를 모바일 AP가 차지할 것으로 추정된다. 애플은 필요한 AP 전량을 삼성전자에서 구매한다. 낸드플래시 메모리와 모바일 D램도 각각 50%, 40%가량 삼성 제품을 쓰고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 애플과 삼성전자의 밀월 관계는 아이폰이 출시되면서 시작됐다. 전략적 부품 공급자로 삼성전자를 선택한 애플은 초기 연구·개발 단계에서부터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공을 들였다. 모바일 칩은 반도체에서 유일하게 고속 성장하고 있는 분야다.

관심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둘러싼 소송전이 이런 협력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모아진다. 전문가들의 분석은 어쨌든 양사의 협력 관계 재정립이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모아진다.

물론 당장 애플이 부품사를 교체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단서가 붙는다. 김영찬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AP에 낸드플래시 메모리, 모바일 D램을 패키지로 묶어 토털 서비스를 할 수 있는 곳은 삼성전자 한 곳뿐”이라며 “공급처를 바꾸면 각 부품을 모두 개별 구매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또한 이들 부품은 한국과 대만의 경쟁력 차이가 크게 벌어져 있는 상태다.

그러나 애플의 부품 공급처 다변화는 시간문제다. 삼성전자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김영찬 애널리스트는 “주 공급자, 예비 공급자, 그리고 가격 협상용 등 공급처를 최소 3개 가져가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삼성전자가 계속해 AP를 독점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소송 이전부터 인텔·TSMC와의 접촉설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애플의 움직임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반도체 업계의 거대한 지각변동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최근 반도체 업계는 영역을 뛰어넘는 무한 경쟁 조짐을 보이고 있다.

CPU 시장의 절대 강자인 인텔이 모바일 AP와 메모리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모바일 AP 디자인 업체인 ARM은 거꾸로 CPU 시장을 공략할 태세다. CPU와 메모리, 모바일 AP라는 시장 구분이 사라진 것이다.

애플도 모바일 AP 디자인 기업인 인트린시티를 포함해 칩 업체 2곳을 인수했다. 이 와중에 인텔은 3D 트랜지스터라는 혁신 제품을 공개해 또 다른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자칫하면 삼성전자가 시장 재편 과정에서 밀려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강력한 카리스마 ‘닮은꼴’

이 회장과 스티브 잡스는 서로 닮은 점이 거의 없어 보인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을 중퇴한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던 철저한 잡초형 CEO다.

반면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삼남인 이 회장은 오랜 경영 수업을 거쳐 대그룹을 물려받았다.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에 직접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스티브 잡스는 청바지에 터틀넥 차림이 트레이드마크다. ‘은둔의 제왕’으로 불리며 고급 슈트를 즐겨 입는 이 회장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경영자로서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절대적 영향력이다. 스티브 잡스와 애플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이 회장 없는 삼성전자는 아직은 상상하기 어렵다.

애플이 아이폰을 앞세워 급성장한 기간은 이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시기와 묘하게 겹친다. 2008년 삼성특검 여파로 회장직에서 물러났던 이 회장은 거의 2년 만인 2010년 3월 경영 복귀를 선언했다.

그 후 3개월 만인 2010년 6월 삼성전자는 야심작 갤럭시S를 내놓고 아이폰에 맞서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지난 1월 스티브 잡스가 병가를 내고 애플을 떠나면서 지금은 정반대 상황이 됐다.

수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와 애플은 서로 부딪칠 게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긴장감이 자라기 시작했다. 적이자 아군이라는 삼성전자와 애플의 복잡 미묘한 관계는 전에 볼 수 없었던 21세기적 현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불안한 동거는 끝났다. 이제 정면 승부가 두 거인을 기다리고 있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사진 한국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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