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글쟁이로 20년 길쟁이로 5년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제주올레길에서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을 만났다. 느리게 걷는 길의 의미를 강조한 그이지만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언론사의 취재 요청과 사람들의 사인 공세에 응하느라 ‘꼬닥꼬닥(천천히)’ 걷는 여유를 즐기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도 그의 걸음엔 여유가 있었다. 거리에서 만난 이들이 인사를 건넬 때 그는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도라지 파는 할망(할머니)과 한참을 서 이야기를 나눴고 엄마 아빠와 올레길을 찾은 아이들을 만날 때면 걸음을 멈추고 말을 붙였다.


끝까지 사수한 ‘안티 공구리’ 정신

“좋은 일 한다”는 지인들의 응원을 받으며 고향에 내려온 것이 2007년 7월. 제주도에 남아 있던 남동생과 길 탐사 작업부터 시작했다. ‘글쟁이’에서 ‘길쟁이’ 길로 돌아선 순간이었다. 길 위에 있을 때 그는 행복했다. 길 찾기 작업도 재미있었다.

며칠을 헤매고 다니다 길 하나를 찾으면 기자 때 특종을 잡은 것보다 더 기뻤다. “특종은 어쩔 수 없이 남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경우가 있죠. 길 내는 일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작업입니다. 또 기사는 아무리 엄청난 특종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전부 잊히는데, 길은 한 번 찾아내고 사람들이 걷기 시작하면 계속 남게 되죠.”

길을 내는 과정에서도 서 이사장의 뚝심은 발휘됐다. 제주올레를 처음 만들 때 내건 슬로건 ‘안티 공구리 정신(콘크리트 포장 절대 반대)’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4차선 도로 1km를 만드는 데 평균 40억 원의 비용이 드는데, 올레길은 900만 원의 정부 보조금만으로 15~ 20km의 길을 냈다. 그중 70%는 팸플릿을 만드는 비용이었다.

기계 없이 자원봉사자들이 손으로 다져가며 길을 만들었다. 올레길 표지를 만들 때도 원칙을 정했다. 친환경 소재를 사용할 것, 사람들이 헷갈릴 만한 갈림길에만 표시할 것, 크기는 되도록 작게 만들 것, 주변 풍광과 어우러질 것.

대규모 콘도와 전시관에 큰 감흥을 못 느끼던 관광객이 오히려 1m 남짓 되는 흙길과 바다 빛을 닮은 푸른색 표지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처음 올레길이 열린 2007년에는 3000여 명이 방문했다. 그 수는 3년 만에 70만여 명으로 훌쩍 늘어났다. 제주올레 사무국의 규모도 상근 직원 11명과 400여 명의 자원봉사자를 둘 정도로 커졌다.

급속한 개발에 상처받은 제주를 다독이려는 안티 공구리 정신은 23개 코스를 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마을 주민들이 찾아와 아스팔트보다 흙길로 우회하는 도로를 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해요. 조금 불편하더라도 자연에 가까운 길을 내자는 올레의 정신을 공감하게 된 거죠.”

비영리 법인으로 독립성을 유지한 것도 하나의 원칙이었다. 정부 보조금이 중단되고 사비를 들여 길을 내야 할 상황에 처했을 때도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명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두 번이나 찾아와 재정 지원을 제안했을 때도 정중히 거절했다.

제주올레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길을 만들어 여행사 좋은 일만 시키지 말고 여행업을 해보라”는 제안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지역 주민의 터전인 여행업·요식업·숙박업은 손대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켰다.

대신 올레만이 할 수 있는 수익 사업을 벌였다. 제주올레를 모티브로 한 간세인형·두건·우비 등을 판매하는 기념품 사업이 대표적이다. 지역 주민과 공생하며 정체성을 지키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20대는 방황할 특권이 있다”

올레길이 열린 지 만 3년 8개월. 지난해까지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올레길을 다녀갔다.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만 700억 원을 웃도는 것으로 예측된다. 길을 걸으며 위로받고 희망을 되찾은 올레꾼들의 메시지는 서 이사장에게 큰 보람과 성취감으로 되돌아온다.

제주올레의 성공 뒤 다른 지역에서도 그 지역만의 길을 내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대구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강릉 바우길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트레일 코스의 러브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스위스의 체르마트 트레일을 시작으로 지난 4월엔 영국의 코츠월드 웨이와 ‘우정의 길’ 협약을 맺었다. 오는 11월엔 캐나다 브루스 트레일에 제주올레를 개장할 예정이다.

“제주올레를 만들겠다고 처음 나섰을 때 이만큼의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회상하는 서 이사장은 처음부터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지금처럼 올레에 관심이 쏠리지 않았어도 저는 만족했을 겁니다. 내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새로 발견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요.”

인터뷰 말미 그는 큰아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서인 ‘제주 걷기 여행’을 통해 “부모 속을 어지간히 썩인 놈”이라며 “기자 노릇 하느라 엄마 노릇 못한 죗값을 이자까지 보태서 치르게 한 아이”라는 사연을 털어놓았던 그 아들이다. 군에 다녀온 뒤에도 학교 생활에 재미를 붙이지 못한 아들에게 자퇴를 권유한 것은 학교가 아니라 엄마인 서 이사장이었다.

“차라리 등록금 낼 돈으로 여행을 다녀와라, 엄마는 대학을 꼭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죠.” 좀처럼 꿈을 찾지 못했던 아들은 어머니를 따라 제주도에 내려왔다가 우연히 요리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은 서귀포의 한 포장마차에서 보조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다. 열정을 되찾은 아들이 자랑스럽다는 그는 가끔씩 지인들과 함께 아들이 일하는 곳을 찾는다고 한다.

서 이사장은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사농공상으로 구분했던 이조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똑같이 300만 원을 벌더라도 대기업에 다니면 부러워하고 구두닦이를 하면 우습게 본다”는 것. 우리 사회가 너무 규격화돼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대학을 꼭 나와야 하고 스펙을 얼마만큼 쌓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취업이 안 된다는 식의 이야기가 대학생의 공포를 조장하는 것 같아요. 그런 목소리는 사회에 진출해도 마찬가지죠.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 이제는 아이 교육비와 노후 자금으로 얼마를 모아야 한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다양한 방면으로 길을 모색하라고 조언했다. “사회가 정해 놓은 길 안에서 버둥거리면서 살지 않았으면 합니다. 젊을 때부터 한 길로만 가야겠다고 고집하지 마세요. 그것은 확신이기보다 고정관념이나 길들여진 선택일 가능성이 큽니다.”

“20대는 방황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이가 어리다고 다 젊은 게 아닙니다.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고 모험도 할 줄 아는 게 젊음이죠. 사회가 정해 놓은 길로만 가는 건 젊음이 주는 조건을 스스로 버리는 게 아닐까요. 긴 인생길을 20대에 전부 결정지으려 하지 마십시오. 우선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을 찾기 바랍니다. 그 다음부터는 간단합니다. 열정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서명숙 이사장 약력 1957년 제주 출생. 80년 고려대 교육학과 졸업. 83~89년 월간 ‘마당’ ‘한국인’ 기자. 89~2001년 ‘시사저널’ 정치부 기자, 취재1부장. 2001~2003년 ‘시사저널’ 편집장. 2005~2006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2007~현재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글·사진 제주=김보람 기자 bramvo@hankyung.com┃사진제공 (사)제주올레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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