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감나무와 편지 한 통

우리는 군인 가족이었다. 아버지·큰아버지·고종사촌형까지 합치면 적어도 50년은 군에 복무하신 것 같다. 가끔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다니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러던 아버지가 1973년 소위 ‘윤필용 장군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면서 갑자기 사라지셨다.

그로부터 1년 반 후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셨지만, 어린 내게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나는 설렘보다 어색함과 두려움이 앞섰다. 그 후 아버지는 ‘군복을 벗고’ 사업을 시작하셨다.

군인으로서 아버지의 일생을 망친 ‘그 사건’. 당시 아버지의 심경이 오죽하셨을까만, 시간이 흐른 후 아버지는 “사감이 아닌 나라를 다스리다가 생긴 일”이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또 지금도 존경하고 있다고 하셨다.

내가 중학생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셨고, 그제야 비로소 군인으로서 ‘남다른’ 국가관을 가진 아버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초·중·고 시절 그야말로 강한 사람의 표상이었다. 절대로 몸이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크게는 국가에 충성하고 윗사람에게 예를 갖추는 법부터 작게는 전화 받는 법,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되는 생활 규칙 등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셨다.

그런 아버지는 언제나 내 인생의 ‘본보기’였다. 내가 ‘가족’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도,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도 모두 아버지에게서 보고 배운 것들이다.

돌아보면 아버지는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자식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던 것 같다. 누나가 결혼할 때, 내가 첫 유학을 떠날 때 아버지는 “이젠 너희들 스스로 발로 인생을 개척해 가야 한다”며 우리들의 발을 씻겨주셨고 지금의 본가를 건축할 때는 우리 3남매를 모아 놓고 “너희들 방이 있는 2층은 서로 의논해 디자인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그때는 그 의미를 몰랐지만 아마도 형제간의 소통과 나눔, 배려의 장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본가 마당에는 그 옛날 아버지가 심어주신 우리 3남매 나무가 여전히 자라고 있다. 아버지는 자식들 이름으로 된 각각의 나무를 심고 우리들에게 각자 자기 나무를 스스로 가꾸게 하셨다. 정성들여 물을 주고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아야만 잘 자라는 나무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싶으셨던 거다.

지금도 아버지는 내 감나무에서 감이 열리면 따지 않고 기다리셨다가 손자들이 오면 직접 따 주시면서 “이게 네 아버지 나무란다. 열매가 많이 열렸구나. 내년에는 좋은 일만 있겠다”며 덕담을 하시곤 한다.

여느 부자(父子) 관계가 그렇듯 아버지와 나도 때론 충돌을 빚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지혜를 발휘하셨다. 한번은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아버지 학교’에 등록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날아온 편지 한 통. “아들아, 난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널 자랑스러워한다. 아버지가 부족해서 미안하구나”라는 편지 내용에 족히 3시간은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내리사랑’이라고들 한다. 두 아이의 부모가 된 지금 나 또한 ‘치사랑’보다 ‘내리사랑’이 익숙한 게 사실이다. 평생을 퍼주기만 한 아버지의 ‘내리사랑’은 그 깊이가 얼마나 될까. 과연 내가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아버지, 이제는 받기만 하십시오. 오래오래 건강한 모습으로 당신의 후손들이 당신의 가르침대로 바르고 아름답게 살아가는지 지켜보셔야지요. 표현에 인색했던 못난 아들, 이제야 고백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지상욱 연세대 공학대학원 겸임교수(전 자유선진당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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