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해외에선 고성장 산업…영세성 ‘심각’
입력 2011-04-27 11:04:16
수정 2011-04-27 11:04:16
총체적 부실 드러난 번역 산업의 재발견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영문판이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재능 있는 재미교포 번역가의 수준 높은 번역이 성공의 숨은 원동력으로 꼽힌다. 반면 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에서 엉터리 번역 오류가 무더기로 발견돼 한국 외교는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있다.열악한 번역 산업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하는 두 단면이다. 세계화와 인터넷 발달로 세계시장에서 번역 산업은 고성장 분야로 각광받지만 한국에서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지난 2월 말 서울지방변호사회의 중소기업 지원 활동에 참여한 송기호 변호사는 우연히 한·EU FTA 협정 영문본을 들여다봤다. 어떤 요건을 갖춰야 한국산으로 인정받는지 궁금해 하는 기업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협정문 한글본을 찾아봤는데 업계의 현실이나 관행에 비춰 턱없이 낮은 수치였다. 그러자 ‘과연 영문본도 그렇게 돼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긴 것이다.
영문본을 구해 본 송 변호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영문본에는 전혀 다른 수치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회에 제출된 비준 동의안을 보면 완구류는 비원산지 재료의 최대 사용 가치가 ‘40%’로 규정돼 있었다.
그러나 EU의 영문본에는 ‘50%’로 되어 있었다. 왁스류 원산지 판정 기준도 영문본과 달랐다. 한글본에는 이 수치가 ‘20%’로 나와 있지만 영문본에는 ‘50%’로 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법적 용어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애니(any)’를 번역에서 누락한 사례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송 변호사는 이런 내용들을 정리해 한 인터넷 매체에 글을 올렸다. 외교통상부를 몇 달째 벌컥 뒤집어 놓은 ‘FTA 번역 오류’ 파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마침내 지난 4월 4일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1279쪽 분량의 한·EU FTA 한글본을 재검독한 결과 무더기 번역 오류가 공식 확인됐기 때문이다.
국제적 망신 자초한 외교통상부
이에 따라 국회에 계류 중이던 비준 동의안을 자진 철회하고 두 차례나 다시 제출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다.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EU FTA뿐만 아니라 한·미 FTA 협정문에서도 번역 오류가 나와 대대적인 재검독을 진행 중이다. 기존에 체결한 각종 조약과 협정들까지 통째로 꺼내놓고 다시 들여다봐야 할 판이다.
세계 10위 경제 대국을 자처하는 나라에서 왜 이렇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는지도 속속 밝혀지고 있다. 애초 외교통상부 직원들은 1300쪽에 달하는 협정문을 외부 전문 번역사에게 맡기자고 건의했다고 한다.
장당 20만 원씩 총 2억6000만 원이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 김 본부장은 예산 문제로 난색을 표하며 법률적인 조항이 들어 있는 특정 부분만 2500만 원에 전문 법률 회사에 맡기는 쪽으로 결정하고 말았다. 2억 원 남짓의 번역료를 아끼려다 국제적인 망신을 자초한 셈이다.
번역 업계 관계자들은 “번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더 큰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정부조차 번역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로 얕보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며 “이런 풍토에서는 번역이 제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 중견 번역 회사 대표는 “정부가 국제 행사 통역에는 많은 돈을 쓰지만 번역 발주 때 단가를 지나치게 깎는다”며 “문제가 생기면 번역 회사가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조항을 넣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외국계 번역 회사 관계자는 “정부의 번역 프로젝트는 단가가 맞지 않아 아예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EU FTA 협정문 번역에서 한국과 EU가 보여준 태도는 극과 극이다. EU는 22개 회원국 언어로 협정문을 번역하는 데 꼬박 1년 이상을 투자했다. 반면 한국은 외통부 직원과 무급 인턴들이 불과 4개월 만에 뚝딱 해치우고 말았다. 한국은 2억 원의 번역료를 아끼려다 망신을 자초했지만 EU는 회원국들을 위해 협정과 조약을 번역하는 데만 한 해 13억 달러를 쓰면서 새로운 번역 시장을 창출해 내고 있다.
한 중견 번역 업체 대표는 “이번 사태는 번역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협정문을 번역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과 인력이 필요한지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 사람이 적절한 품질을 유지하면서 번역할 수 있는 양을 최대 A4 10장 정도로 본다”며 “이 수준이 넘어가면 품질 유지가 어렵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품질 검수와 관련된 부분이다. 여러 사람이 번역에 참여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온갖 문제들이 발생한다.
대표적인 것이 용어 통일이다. 한·EU FTA 협정문에서 발견된 번역 오류도 상당수가 용어 통일과 관련돼 있다. 그는 “만약 FTA 협정문 번역을 맡았다면 처음 한 달은 문서를 보면서 용어 사전을 만드는데 투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번역료 10년째 제자리걸음
FTA 번역 오류 파동은 열악한 국내 번역 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한 단면일 뿐이다. 수년 전 ‘21세기 유망 직업’으로 번역사가 빠지지 않고 선정되기도 했지만 현실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국내 8개 통번역대학원에서 매년 500명가량의 졸업생이 쏟아져 나온다.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고학력 실업자들도 번역 시장을 넘본다. 민간이 시행하는 번역사 시험이 있고 그 시험을 준비하는 학원도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번역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여전히 요원한 일이다. 백원근 책임연구원은 “번역 예비군들이 많다 보니 번역료는 10년 전 수준 그대로”라고 말했다.
현재 번역 업계에는 영세 업체들이 대부분이다. 정운화 브릿지글로벌 사장은 “온라인에서 확인되는 1500개 번역 업체 중 활동이 활발한 곳은 380개 정도”라며 “그 가운데 법인 형태를 갖춘 곳이 15개 미만”이라고 말했다.
진입 장벽이 워낙 낮기 때문에 단가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정 사장은 “단가가 2배 이상 차이 나는 경우도 있다”며 “일정 수준의 단가를 보장하는 대신 높은 품질을 요구하는 고객사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이 번역은 무조건 싸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했다.
시장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번역 산업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찾기 어렵다. 전문가에 따라 전체 번역 시장 규모를 수천억 원에서 수조 원까지로 제각각 추정한다. 번역 시장은 크게 출판 번역과 영상 미디어 번역, 산업 번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출판 번역 시장은 어느 정도 규모 추산이 가능하다.
국내 출판 시장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27% 안팎이다. 매년 쏟아지는 신간 3권 중 1권이 번역서인 셈이다. 백원근 책임연구원은 “베스트셀러 상위권만 보면 절반 이상이 번역서”라며 “국내 출판계의 번역서 의존도가 매우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출판 번역 시장에서 A급 번역가의 번역료는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장당 4000원대다. 원고지 1000장짜리 장편소설 한 권을 번역해야 겨우 400만 원이 돌아오는 것이다.
지난 2009년 한 해 동안 출판된 신간은 모두 4만2191종에 달한다. 이 중 1만1681종을 번역서로 볼 수 있다. 이를 모두 A급 번역가가 참여한 것으로 가정하면 전체 시장 규모는 467억2400만원(1만1681종×1000장×4000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현재 국내 문학작품의 해외 번역 출판에는 정부가 지원하고 있다. 2001년 설립된 한국문학번역원이 이 역할을 맡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소설가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도 해외 진출을 위한 샘플 번역비를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지원받았다.
번역원의 올해 예산 규모는 78억 원 정도로 국내 문학작품의 번역사업 지원이 주 업무다. 지원 대상에 선정되면 권당 1600만 원을 보조해 준다. 박경희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출판팀장은 “보통 외국인과 한국인 2명이 한 팀을 이뤄 지원한다”며 “1인당 800만 원을 받는 셈이기 때문에 이것으로는 생계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소설책 한 권을 제대로 번역하려면 통상 1년 이상을 매달려야 한다. 번역원은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2009년부터 지정 번역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매년 5팀을 선정해 기존보다 훨씬 많은 권당 3000만 원의 번역료를 지원해 주는 것이다.
세계가 번역 산업에 주목하는 까닭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번역 시장은 매년 고성장을 누리고 있다. 미국의 전문 조사 업체인 커먼센스어드바이저리에 따르면 2008년 세계 번역 서비스 시장 규모는 142억5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이 업체는 번역 서비스 시장이 향후 5년간 매년 10.76%씩 성장해 2013년에는 250억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한다. 세계시장 1위는 미군에 언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링귀스트 솔루션즈(6억9100만 달러)가 차지했다.
이어 전통적 강자인 라이온브리지테크놀로지스(4억6100만 달러)와 L-3커뮤니케이션즈(4억3459만 달러), SDL인터내셔널(2억9454만 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2008년 조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아시아 업체들의 약진이다. 일본의 혼야쿠센터(21위)와 크레스텍(26위), 중국의 하이소프트테크놀로지(23)가 톱30에 이름을 올렸다.
세계 번역 시장의 성장 축은 산업 번역 분야다.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늘어나면서 번역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노재훈 SDL코리아 사장은 “글로벌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매년 20~30%씩 성장해 왔다”며 “불황이라고 프랑스에 팔아야 할 휴대전화를 만들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SDL코리아만 보면 매출 규모가 연간 100억 원 수준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자사 제품 판매를 위해 매년 번역 서비스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다. 노 사장은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제품을 세계 100개 이상 언어로 동시에 론칭한다”며 “마이크로소프트의 전체 연구·개발(R&D) 예산의 20%를 제품 현지화에 투자한다”고 말했다. HP나 시스코시스템즈도 매년 100억 원 이상을 번역 서비스에 쓰고 있다.
번역은 국내 대기업들에도 점점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노 사장은 “산업 번역은 번역량 자체가 상상을 초월한다”며 “관리 시스템의 도움 없이 단순 수작업에만 의존해서는 해결이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각 사업부·제품별로 번역을 진행하다 보니 중복 작업이 많고 통일성 유지에도 문제가 생긴다. LG전자는 2009년 SDL코리아와 함께 트랜슬레이션매니지먼트시스템(TMS)을 구축해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연간 번역 물량이 수십억 원 규모는 돼야 한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