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찬성 여론 ‘쏙’…에너지 안보 대안 ‘고민’

일본 지진 사태로 ‘원전 르네상스’ 급제동

일본 동북부 대지진에 따른 원전 재앙이 예고되는 가운데 유럽 원전 산업에도 비상이 걸렸다.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밝혔던 나라들은 당분간 신중한 태도로 돌아설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기존 노후 원전에 대한 가동 연장 조치를 검토했던 나라들 역시 이를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기존 원전에 대한 유럽연합(EU) 차원의 안전 관리 역시 대폭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에서 원자력발전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르네상스’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제2의 부흥기’를 누리는 듯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이런 움직임에 급제동이 걸린 것이다.

영국 노동당 정부는 3년 전 차세대 원전 건설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지난 1987년을 끝으로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했던 영국이 친환경 에너지원으로서 원전 산업을 집중 육성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 연일 안방 생중계

<YONHAP PHOTO-0327> People hold a banner during a demonstration on March 13, 2011 on the Parvis des droits de l'homme (Human rights Esplanade at the Trocadero) in Paris, called by French "Sortir du nucleaire" (Get out of nuclear) association demanding an end to nuclear policy in the wake of the nuclear emergency in Japan. Japan battled a nuclear emergency today in which the government said two partial meltdowns may have taken place and radiation had escaped from reactors at a quake-damaged atomic power plant. The 8.9-magnitude earthquake and tsunami left more than 1,000 dead, at least 10,000 missing and seriously damaged a nuclear power plant. Background is the Eiffel tower. The banner reads : Get out of nuclear, it 's possible ! ".AFP PHOTO MIGUEL MEDINA /2011-03-14 05:40:17/ <저작권자 ⓒ 1980-201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북해 유전의 석유 매장량이 줄어들고 국제 유가 전망이 고공 행진을 계속하면서 영국 정부로서는 기존 원전 정책의 궤도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은 이를 위해 이미 원전 건설 후보지를 11개나 선정해 발표한 바 있다.

선진 8개국(G8) 중 유일하게 자체 원전을 보유하지 않았었던 이탈리아의 원전 정책 선회는 더욱 드라마틱했다. 이탈리아는 1986년 체르노빌 방사능 사고 이후 국민투표를 거쳐 원전 건설 중단 및 기존 원전 폐쇄라는 반(反)원자력 정책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러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지난 2009년 원전 선진국 프랑스와 원자력 협정을 맺고 20년이 넘는 반(反)원전 정책에 마침표를 찍었다. 수입에 과도하게 의존해 온 에너지 공급 구조를 바꿔 에너지 자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내 원전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현실적 판단의 결과였다.

핀란드와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도 기존의 소극적 태도를 바꿔 구형 원전 교체나 신규 원전 건설에 팔을 걷어붙였다. 이미 국내 전력 생산의 70~80%를 원자력발전에 의지해 오던 원전 수출 선진국 프랑스는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이렇게 EU 내 선진국 그룹 대부분이 원자력발전의 제2 전성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터진 것이다.

더욱이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이후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누출 사고가 연일 세계인의 안방에 생방송되면서 원전 산업을 둘러싼 주변 환경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서서히 확산돼 온 원전 찬성 여론이 뒤집히는 데는 채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지구온난화를 가속화하는 화석연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친환경 에너지원으로 관심을 끌어왔던 원전이 일순간에 방사능 재앙을 가져올지도 모를 공포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지난 3월 16일 EU 에너지 장관과 원자력 전문가들은 브뤼셀에서 원전 안전성 문제를 놓고 긴급 회동을 갖고 역내 143개 원전 전반에 대한 안전성 검사(스트레스 테스트)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검사에는 물론 과거보다 엄격한 안전기준이 적용될 것으로 알려졌다.

EU 차원의 발 빠른 대응에도 불구하고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둘러싼 유럽 각국의 해법에는 약간의 온도차가 감지되는 것도 사실이다. 신중론으로 가장 먼저 돌아선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 정부는 후쿠시마 쇼크가 에너지 시장을 강타하자마자 1970년대에 지어진 원전 가동을 늦어도 오는 6월까지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벨기에 역시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 조치를 EU 안전성 검사 조치가 실시될 때까지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등 원전 건설에 반대해 온 나라들도 이번 기회에 원전에 대한 EU 차원의 안전성 검사 기준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스위스는 3기의 신규 원전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 승인 과정을 잠정 중단했다.

원전 선진국인 프랑스에서는 다소 신중한 태도가 감지된다. 그러나 최대 일간지 ‘르 몽드’조차 “원전 르네상스가 자칫하면 ‘원전 홀로코스트(대학살)’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원전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 유럽 국가들이 원전 분야에서 기존 정책에 대한 재검토 움직임을 보이면서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우려하고 있다. 첫 번째는 지속 가능한 저탄소 에너지원 개발 문제다. 두 번째는 글로벌 테러리즘과 같은 정치적 위협 요소로부터 장기적 에너지 공급원을 어떻게 보호하느냐의 문제다.

원전은 정치적 여론에 예민한 사안

<YONHAP PHOTO-0113> A general view shows French nuclear Tricastin site in southeastern France July 8, 2009. France is set to keep its oldest nuclear reactors running for another 10 years, buying time to build replacements, after its nuclear safety agency ASN agreed in principle to the move. REUTERS/Sebastien Nogier (FRANCE ENERGY)/2009-07-09 00:53:56/ <저작권자 ⓒ 1980-200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체르노빌 사태 이후 20여 년간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했던 원전 산업이 최근 르네상스를 맞게 된 데는 무엇보다 기후변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석유 등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저탄소 에너지원으로서의 가능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전 르네상스에 제동이 걸리는 조짐이 나타나면서 에너지 시장에서는 벌써부터 혼란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유럽 언론들은 몇몇 나라들이 원전 가동 연장 계획을 중단한다고 밝힌 후 국제시장에서 탄소배출권 가격이 급등했다고 보도했다.

석유·가스 등 기존 에너지원에 대한 장기 가격 전망이 크게 상승한 것은 물론이다. 모두 에너지 기업들의 화석연료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반면 원전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식으면서 국제시장에서 우라늄 가격이 하락하고 있다.

‘후쿠시마 쇼크’가 진정되기까지 적어도 몇 년간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인류는 다시 한 번 원전을 대체할 만한 저탄소 에너지원 개발이라는 문제와 힘겨운 씨름을 벌여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석유·가스 등 전통적 에너지원의 공급 안정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원전 산업이 지난 몇 년간 금의환향했던 데는 국제정치적 요인도 중요한 고려 사항으로 작용했다.

글로벌 테러리즘이 국제정치의 위협 요소로 떠오르면서 서구 산업국가들로서는 석유나 가스 같은 전통적 에너지원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해 왔다.

전 세계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의 상당 부분이 중동과 러시아 등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에 적대적이거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들의 통제권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원자력발전의 연료로 쓰이는 우라늄은 상당 부분이 친서방 국가들에 분포해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우라늄 매장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호주다. 카자흐스탄·캐나다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우월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안정적 공급원을 확보하려던 유럽 선진 국가들의 구상이 후쿠시마 사태로 예기치 못한 암초를 만난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원전 업계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업계의 이해를 대변하는 유럽원자력포럼(FORATOM)은 EU 회원국들이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재검토하거나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 계획을 철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속병을 앓고 있다.

유럽원자력포럼은 우선 기존 원전들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기준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EU 차원의 안전성 검사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 사태의 문제점에 대한 기술적 결론이 나오기 전에 각국 정부가 ‘정치적’ 결론을 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방선거를 코앞에 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원전 가동 중단을 가장 먼저 선언하고 나선 것을 은근히 겨냥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원전 건설 프로젝트는 어느 나라에서도 정치적 설득이나 동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추진된 사례가 없다는 데 있다. 게다가 ‘후쿠시마 사태’로 인해 원전 프로젝트는 여론의 눈치를 더 많이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성기영 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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