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TV 사업 적자 ‘충격’…수요 둔화 ‘위기감’
입력 2011-03-22 11:52:48
수정 2011-03-22 11:52:48
삼성·LG가 3D 기술 논쟁에 목숨 거는 진짜 이유
감정싸움으로 치닫던 TV 업계의 3D 기술 논쟁이 ‘자제 모드’로 들어섰다. TV 시장의 두 거인인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날선 다툼이 그리 새로울 것은 없다. 이들은 과거에도 다양한 사안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해 왔다.하지만 이번처럼 노골적인 상호 비방을 장기간 이어간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연초부터 불붙은 양사의 공방은 표면적으로 보면 ‘셔터 안경 방식(삼성전자)’과 ‘필름 패턴 편광안경 방식(LG전자)’의 기술적 우월성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들이 3D 기술 표준 문제에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이면에는 TV 시장의 위기가 자리해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세계 TV 시장의 절대 강자는 삼성전자다. 30년 넘게 소니가 장악하고 있던 이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돌풍을 일으킨 것은 지난 2006년이다. 그해 삼성은 붉은 포도주가 담긴 와인 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보르도 TV로 소니의 아성을 단숨에 허물어 버렸다. 시장의 경쟁 구도를 디자인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LG전자도 2009년 소니를 3위(판매량 기준)로 밀어내며 한국 업체들의 전성기를 열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에도 세계 1위 TV 업체라는 타이틀을 무난하게 지켜냈다. 하지만 내실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삼성전자는 작년까지 사업 부문별로만 실적을 발표했다. TV가 포함된 디지털 미디어 부문은 지난해 3분기(2300억 원)와 4분기(1700억 원)에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디지털 미디어 부문에서 TV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60~70%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TV에서 두 분기 연속 수천억 원대의 적자를 냈다는 계산이 나온다. 사정은 LG전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LG는 지난해 매출 기준으로도 소니를 제치겠다고 공언했지만 판매량마저 밀려 3위로 주저앉았다. TV가 포함된 LG전자의 홈엔터테인먼트 부문(TV 비중 75%)도 4분기 12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소비자들 TV보다 스마트폰에 더 관심
지난해 초반만 해도 시장에는 낙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밴쿠버 동계 올림픽(2월), 남아공 월드컵(6월) 등 TV 수요를 자극하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TV 업체들도 발광다이오드(LED) TV와 3D TV를 앞세워 적극적인 시장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은 딴판이었다. 5월 노동절 휴일 이후 TV 수요가 확연하게 꺾이기 시작한 것이다. 장정훈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작년 상반기 시장이 워낙 좋아 많은 업체들이 재고를 엄청나게 쌓아 둔 상황이었다”며 “3분기 이후 수요가 줄며 재고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TV 업체들은 작년 하반기 내내 늘어난 재고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다. 문제는 TV 업체들의 수익성 악화가 단기적인 현상으로 끝날 것인지다. 실적 부진을 재고 이슈로만 본다면 재고를 모두 털어내는 한두 분기 후에 수익성 문제가 모두 사라질 것이다. 놀랍게도 전문가들의 진단은 비관적이다. 지난해 나타난 수요 감소 현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1월 일본 경제 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는 ‘삼성전자 적자 전환의 진상’이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삼성전자 TV 부문의 2분기 연속 적자가 준 충격을 분석한 내용이다. 이 잡지는 지난 수십 년간 ‘가전제품의 왕’으로 군림해 온 TV가 올 들어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며 삼성전자를 비롯한 세계 TV 업체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이 잡지는 “세계 TV 업계의 빙하기가 시작됐다”고 경고했다.
TV 시장의 위기를 이해하려면 좀 더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황준오 대우증권 애널리스트는 “정보기술(IT) 분야 수요 자체가 모바일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 같은 새로운 모바일 기기들이 TV 수요를 흡수해 버렸다는 뜻이다. 황 애널리스트는 “소비자들이 쓸 수 있는 돈은 어차피 한정돼 있다”며 “돈이 있으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먼저 사지 TV를 사지 않는 추세”라고 말했다.
선진국 시장의 포화도 수요 감소의 한 요인이다. 이승철 토러스증권 애널리스트는 “아무리 신흥 시장이 있어도 미국이나 일본·유럽 등 선진 시장에서 판매가 늘어야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선진국에서는 액정표시장치(LCD) TV가 90% 이상 브라운관(CRT) TV를 대체해 앞으로는 교체 수요 정도만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그동안 TV 시장은 선진국과 중국이라는 두 개의 성장엔진에 힘입어 매년 30%가 넘는 고성장을 해왔다. 장 애널리스트는 “선진국 수요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기존 성장률을 유지하려면 중국 시장만한 크기의 새로운 시장이 창출돼야 한다”고 말했다.
보르도TV→LED TV→3D TV?
보르도 TV에 이은 삼성전자의 히트작은 2009년 선보인 LED TV다. LCD TV의 광원을 냉음극형광램프(CCFL)대신 보다 밝고 생생한 컬러 표현이 가능한 LED로 바꾼 이 제품은 초반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LED TV’라는 새로운 제품 카테고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지난해 LED TV 판매 실적은 업계의 기대치를 훨씬 밑돌았다. 새로운 프리미엄 제품을 계속 내놓으며 시장을 키워가는 성장 전략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황 애널리스트는 “전체 LCD TV 시장에서 LED TV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상반기 15%까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치솟았다”며 “하지만 그이 후 성장 속도가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비싼 값을 지불하고라도 프리미엄 제품을 사는 고객층이 대략 15% 정도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장 애널리스트는 “LED TV가 시장의 메인 제품이 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가격”이라며 “일반 소비자에 어필하려면 최소한 100만 원 밑으로 가격이 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업체들이 주도하고 있는 3D TV 시장은 문제가 좀 더 심각하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지난해 3D TV를 LED TV에 이은 차세대 프리미엄 제품으로 내놓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지만 소비자의 반응은 썰렁했다.
최근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요란한’ 3D 기술 논쟁을 3D TV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으로 보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황 애널리스트는 “3D TV가 LED TV처럼 독자적인 제품군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콘텐츠 부족이다. 3D TV를 사도 볼만한 콘텐츠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애널리스트는 “3D TV 보급에는 공중파 방송 콘텐츠의 3D 전환이 가장 중요하다”며 “아직은 광고주와 방송사들이 3D에 큰 메리트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물론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3D TV가 독자적인 제품 카테고리가 아니라 프리미엄 제품의 부가 기능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차세대 주력 제품으로 거론되는 것이 바로 스마트 TV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스마트 TV가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에 쏠린 소비자들의 관심을 되찾아 오는 비장의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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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안현승 디스플레이서치 한국지사장
“표준화 이후로 3D TV 구매 미룰 수도”
세계적 IT 시장조사 업체인 디스플레이서치 안현승 지사장은 “올해는 월드컵 같은 빅 이벤트가 없다”며 “선진 시장보다 성장 시장의 브라운관(CRT) 대체 수요를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 지사장은 삼성전자와 AKT코리아를 거쳐 2007년부터 디스플리이서치 한국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 최근 TV 시장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TV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북미와 유럽 수요가 정체되고 있다. 기대를 한몸에 받는 중국 시장조차 현지 업체들의 손익 문제로 프리미엄 제품인 LED와 3D에 집중하는 전략을 보이고 있다.
▶ TV 판매 부진은 단기적인 현상인가.
인도를 비롯한 브라질 등 새로운 성장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 이 지역의 CRT를 LCD로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처럼 빠르게 대체 수요를 촉발하지 못하면 성장이 한계에 부닥칠 것이다. 고가 프리미엄 제품으로 선진 시장을 공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 3D TV가 새로운 프리미엄 제품으로 안착할 수 있을까.
아직은 여러 가지 리스크가 있다. 3D TV 자체가 아직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시 표준 전쟁이 불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시장을 확대해 가야 할 시점에 오히려 소비자에게 불안감과 혼동을 줄 수 있다. 여전히 안경을 써야 하고 어지럼증도 생긴다. 3D 콘텐츠가 지상파로 들어와야 하는 것도 중요한 숙제다.
▶ 최근 3D 기술 논쟁을 어떻게 보나.
작년에는 시장 확대를 위해 기술보다 생동감 있는 영상에 포커스를 맞췄다. 그러나 최근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다시 3D 기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어느 쪽이 이기든 표준화가 정립된 다음으로 3D TV 구매를 미룰 가능성도 있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