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문사철(文史哲) 콘서트] 위기의 중년, 꿈을 리모델링하라

단조롭고 따분한 일상 벗어나기

프랑스인 알렉시스 토크빌은 미국을 여행하면서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 1835)’를 썼다. 이 책에서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도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라는 제목의 장에서 불만과 높은 기대, 선망과 평등의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중략)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 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토크빌은 귀족 사회의 제약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1776년(미국 독립선언)이나 1789년(프랑스 혁명)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근대 서양의 주민이 중세 유럽의 낮은 계급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궁핍한 계급은 근대의 후손이 결코 누리지 못할 정신적 평온을 누렸다고 보았다. 신이 정해준 일종의 불가피한 고난이라는 종교적 숙명론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토크빌에 따르면 귀족 사회에서 하인은 선뜻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런 하인들은, 토크빌의 표현을 빌리면 “드높은 생각, 강한 자부심과 자존심”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는 언론과 여론이 하인들도 사회의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고, 그들 역시 산업가나 판사나 과학자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무자비하게 부추겼다.

이렇게 무제한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면 처음에는 특히 젊은 하인들 사이에 명랑한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 가장 재능이 뛰어나거나 운이 좋은 사람은 목표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수는 신분 상승에 실패한다. 토크빌은 그들의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울화 때문에 생기를 잃고 자신과 주인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갔다.

작은 차이에 박탈감 느끼는 이유는?

<YONHAP PHOTO-1084> Softbank Corp. President Masayoshi Son speaks during a news conference, unveiling Japan's third largest mobile carrier's new lineup for this summer at a Tokyo hotel Tuesday, June 3, 2008. (AP Photo/Itsuo Inouye)/2008-06-03 18:42:18/ <저작권자 ⓒ 1980-200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또한 토크빌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미국 사회는 유럽 사회처럼 신분적인 굴레가 사라졌지만 하층민들은 오히려 노동의 굴레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 노동의 굴레는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허상을 좇는 데서 온다고 분석한다.

‘아메리칸 드림’은 대다수 사람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도 언론이나 사회가 성공할 수 있다고 부추겨 결국 사람들을 ‘착취’한다는 식으로 풀이한다. 어쩌면 아메리칸 드림과 같은 큰 성공이야말로 시장의 법칙처럼 10명 중 1명에게만 돌아가는 영광이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한 아버지가 있다. 그에게는 오래된 가슴앓이가 있는데 다름 아닌 ‘학력 콤플렉스’라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 덕분에 개인 사업장을 운영하며 넉넉한 생활을 해 올 수 있었다.

40대 중반을 넘기면서 어느 날 그를 괴롭혀 온 학력 콤플렉스가 도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토크빌이 분석한 대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 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는 단조로운 사업장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하나의 원칙을 정해 놓으면 결코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최근 그는 중대 결심을 했다. 미국에 있는 대학에 유학을 가겠다고 부인에게 알렸다.

유학을 가지 못하면 죽을 것 같다고 부인에게 말했다. 날벼락 같은 최후통첩에 부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중학생인 두 딸도 미국행에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유학비용과 미국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살던 단독주책과 오피스텔을 급매물로 내놓았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필자는 한 가장의 학력 콤플렉스가 한 가정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사회에서 학력 콤플렉스가 이렇게 무서운 것일까. 마흔 중반을 넘긴 나이에 미국의 이름도 없는 대학(학부과정)에 유학을 가서 도대체 무엇을 얻겠다는 것일까.

유학을 다녀온들 무슨 이득이나 비전이 있는 걸까. 다른 방도는 없었을까. 예컨대 조그마한 사업장을 운영하는 삶이 단조롭고 따분하다면 1년 정도 해외여행을 하면서 세상을 두루 둘러보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갑자기 단란하던 한 가정이 마치 일본의 쓰나미 경보가 울린 도시처럼 위기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결국 오는 9월에 단지 미국 대학 졸업장을 따야겠다는 일념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학벌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이며 희생양일 것이다.

새로운 도전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다만 목표와 비전만은 분명해야 그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도 더 의미가 있는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미국은 금융 위기 이후 먹고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에게는 ‘아메리칸 드림’ 같은 목표도 없다지만 더욱이 ‘아메리칸 드림’은 더 이상 살아있는 신화가 아니라고 한다.

농경사회는 천재지변이 없는 한 매년 어느 정도의 수확이 보장돼 있고 파종에서 수확까지 리더가 해야 할 결정적인 역할은 없다. 수렵시대에는 한 부족의 리더에게 생존권이 달려 있었다. 사냥터에서 부족들에게 길을 자칫 잘못 인도하면 전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디지털 수렵사회’에 비유되기도 한다.

요즘은 급변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칫 정보만 잘못 분석해도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사회·국가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40대 후반에 돌연 미국 유학을 선택한 그 가장은 자신과 디지털 세상에 대해 더 면밀하게 분석하고 유학 후의 삶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그 선택의 용의주도함에 따라 그 가정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비전·목표 없는 리모델링은 ‘낭패’

한 가장의 ‘뜻밖의 선택’을 접하면서 최근 접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글이 떠오른다. 손 회장은 지진 발생일인 3월 13일 자신의 트위터에 “3월 11일부터 1주일간 소프트뱅크 휴대전화 문자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번 재해로 돌아가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빌며 살아계신 분들의 건강을 기원한다”라는 글을 남겼다. 우리나라 대기업 회장들은 구제역으로 온 나라가 들끓어도 트위터에 국민의 고통을 함께하는 글을 올렸다는 뉴스를 본 적이 없다. 대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여전히 ‘비호감’에 머물러 있는 것은 우리 국민들의 불행이다.

손정의 회장은 ‘감성경영론’으로 성공 신화를 쌓아 온 인물이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고객과의 소통, 나아가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서도 반드시 ‘감성의 논리, 논리의 감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또 바로 실천하고 있다. 그에게서 가끔 봄바람과 같은 ‘따뜻한 자본’의 향기가 묻어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손 회장은 바로 197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주인공이다. 토크빌조차도 ‘아메리칸 드림’에 회의적이었지만 손 회장은 고등학생 때 미국에 건너가 기적 같은 성공 신화를 쏘아 올렸다.

“‘아! 그래서 버클리대학의 자유롭고 활달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이 들자 미국에 와서 공부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어요.”

손 회장 역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쓰나미와 같은 비즈니스 환경에서 ‘냉혹한 자본가’가가 될 수밖에 없지만 이와 함께 고객 혹은 사회와 소통하는 자본가로 다가온다. 어쩌면 손 회장의 아메리칸 드림은 더불어 사는 사회 속으로 계속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무엇보다 내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오.” 카이사르가 한 이 말에는 명확한 ‘비전과 목표’가 뒤따를 때에야 크나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중년기에는 맹목적인 성공 신화에서 벗어나 때로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꿈의 리모델링’에도 나서야 한다.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그 가장에게도 부디 미국 유학이 진짜 나를 찾는 ‘자아 리모델링’의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제, 나만의 꿈을 위한 아메리칸 드림은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아메리칸 드림은 계속돼야 한다.

197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아메리칸 드림은 성공 신화가 될 수도 있지만 명확한 비전과 목표 없이 도전하면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비교문학 박사.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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