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문사철(文史哲) 콘서트] 죽음은 평등하기에 위안을 준다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음을 ‘소비’한다. 현대에 이르러 신문 부고란(訃告欄)은 산 자에게는 살아있음을 ‘안도’하게 하면서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억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즉 신문의 부고란은 죽은 자의 정보를 대면함으로써 산 자 또한 죽음에 강박되어 간다. 돈 드릴로의 소설 ‘화이트 노이즈’에서는 글의 전개 과정과 관계없이 불쑥불쑥 죽음의 그림자가 튀어나와 죽음의 공포를 환기시킨다.

“부고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죽은 이의 나이를 확인한다. 그러면서 저절로 그 숫자를 내 나이와 연결 짓게 된다. ‘4년 남았구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9년 더 남았네. 2년 있으면 난 죽는구나. 죽을 때를 생각할 때보다 숫자의 힘이 더 명백해지는 순간은 없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미디어를 통해 ‘소비’되는 죽음을 마주칠 때마다 죽음의 공포를 체험한다. 그럴수록 이들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쇼핑함으로써 살아있음에 안도하면서 삶의 본능을 추구한다.

죽음을 ‘대량생산’하는 사회

<YONHAP PHOTO-0818> 바람처럼 훨훨... (순천=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아름다운 마무리...평생을 무소유와 청빈의 삶을 살아 온 법정 스님의 다비의식이 13일 오전 전남 순천시 송광사에서 열려 법정 스님의 법구가 하늘 높이 타오르고 있다. 2010.3.13 minu21@yna.co.kr/2010-03-13 12:24:46/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슈퍼마켓에서 주인공 잭은 아내에게 애정을 느낀다. 쇼핑을 하는 한 그들은 ‘죽지 않는다.’ 그곳에서 물건을 사는 한 그들은 죽지 않는다. 사람들은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쇼핑센터로 간다. 그곳에서 물건을 소비함으로써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아늑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흔히 ‘삶이 허무하다고 느껴지면 시장에 가보라’는 말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억압한다고 해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도시인들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릴케는 이 소설에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모여든다. 하지만 내게는 도리어 죽기 위해 모인다는 생각이 든다”고 얘기한다.

릴케는 도시에서의 죽음을 ‘죽음의 대량생산’이라고 표현한다. 주인공 말테는 어린 시절에 겪은 고향에서의 죽음을 ‘큰 죽음’에 비유한다. 그 죽음의 소리는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소작촌에까지 무려 두 달 동안이나 큰소리로 들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병원에서 ‘대량생산’하듯이 죽음을 생산해 낸다고 비유한다. 또 길거리에서 느닷없는 죽음을 맞기도 한다.

릴케가 묘사한 것처럼 현대사회는 죽음을 ‘대량생산’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꺼내기 싫은 일종의 금기어 중의 대표적인 게 ‘죽음’일 것이다.

지난해 이맘때쯤 한 죽음이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바로 법정 스님의 죽음이다. 살아서도 무소유로 일관했던 법정은 죽어서는 우리에게 죽음의 의미까지 되짚어보게 했다. “나 죽은 다음에 시줏돈 걷어서 거창한 탑 같은 것 세우지 말고, 어떤 비본질적인 행위로도 죽은 뒤의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라.”

그는 또한 “재단이건 장학 사업이건 내 이름을 건 어느 아무것도 하지 마라. 만약 내 이름을 팔아 쓸데없는 일을 도모한다면 저승에서라도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치겠다”고 일갈했다. 그는 한줌의 재가 되어 한때 살았던 불일암의 후박나무 아래에 뿌려졌다.

그 후박나무는 스님이 1975년 초가을 불일암에 온 직후 심은 것이다. 그는 넉넉한 그늘을 제공한 이 나무 아래서 독서와 명상을 즐겼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다시 봄이다. 법정의 책을 읽다보면 유난히 봄에 대한 글들이 많이 나온다. 그는 글마다 우리 모두가 봄날 피어나는 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향기를 줄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 그런데 법정 스님의 1주기를 맞아 이런저런 씁쓸한 일들과 함께 말들이 회자되고 있다.

“이사이 절집에서 ‘일’이 벌어졌다. 한 상좌가 은사 스님 유고(有故)에 대비해 길상사 창건주 승계와 저작권 ‘확보’에 나선 것이다. 급기야 한 상좌가 미국으로 건너가 병석의 스님에게 ‘이러다 큰일 납니다. 창건주 승계서를 써주십시오’라고 매달렸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이는 ‘상좌가 부르는 대로 받아 쓴 스님은 펜을 바닥에 집어 던졌고, 그가 병실을 나가자 ‘내가 상좌를 잘못 뒀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최근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보면 마치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영화 ‘마지막 인생’과 오버랩 된다. 톨스토이의 사상에 매료된 ‘톨스토이안(톨스토이주의자)’은 톨스토이의 이상사회론을 현실에 실천하려는 이들의 단체다.

톨스토이안을 이끄는 인물인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는 일체의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톨스토이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톨스토이의 저작권을 자신들의 단체에 귀속시키려고 톨스토이를 설득한다. 그 고뇌의 시간에 톨스토이는 그의 수제자에게 저작권을 줄 수 없다는 아내 소피아의 처지도 이해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결국 톨스토이는 수제자의 요구에 응하고 저작권을 넘겨준다. 톨스토이도 자신의 재산권 포기를 둘러싸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게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톨스토이 사후에 소피아는 톨스토이의 저작권을 다시 찾아온다.

법정 스님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는 출간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쩌면 톨스토이보다 더 철저했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계속 지켜져야 할 것이다. 이게 법정 스님이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삶의 유한성은 살아있음에 대한 위로

톨스토이가 쓴 ‘참회록’을 읽다보면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글들을 마주할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사교 생활에 진정성이 찾아온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입원실까지 와줄 것인지 생각해 보면 만날 사람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도 자신이 죽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대목이 나온다. “동료의 죽음이 사람들 저마다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킨 것은 자리 이동이나 직위 변경에 관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비록 친한 동료가 죽었지만 막상 사망 소식을 접하자 으레 그렇듯이 자기가 아니라 그가 죽은 데 대해 안도하는 기분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지위’에 목을 매단 사람이다. 고등법원 판사라는 직위는 존중을 받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45세에 갑자기 옆구리에 통증을 느끼고 결국 죽어간다. 그런데 그의 부인은 자신이 받을 연금 규모가 줄어들까봐 걱정이고 사교계의 명사인 딸은 아버지의 장례식 때문에 자신의 결혼 계획이 엉망이 될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헤로도토스의 말에 따르면 이집트에서는 잔치가 끝날 무렵 참석자들이 거나해져 있을 때 하인들이 들것에 해골을 담아 연회장 탁자 사이를 돌아다니는 관습이 있었다. (중략) 참석자들은 그것을 보고 잔치판에서 더 강렬한 즐거움을 맛보았을까.

아니면 새삼 심각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갔을까.” 톨스토이가 ‘참회록’에서 한 이 말을 떠올린다면 삶에서 무엇이 소중하고 또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되새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죽고 ‘먼지’로 되돌아간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억압을 견딜 수 없다면 ‘참회록’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보자.

“우리 자신의 유한성을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의 죽음, 특히 우리가 큰 열등감과 질투를 느끼게 되는 업적을 쌓은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지위에 따른 불안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잊히고 무시당하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아무리 강하고 존경받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가 결국은 가장 민주적인 물질, 즉 먼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비교문학 박사.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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