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정부 위에 나는 물가

경제부처 24시

“오늘은 정말 내놓을 게 없네요.”

이용재 기획재정부 물가정책과장은 지난 2월 25일 관계 부처 합동 물가안정대책회의가 열리기 전 이렇게 털어놓았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지만 정부가 마땅히 내놓을 대책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는 연초부터 물가가 급등하자 1월 14일부터 매주 금요일 임종룡 재정부 1차관 주재로 각 부처 차관들이 참석하는 물가안정대책회의를 열고 있다. 하지만 ‘물가 비상시국’이 두 달 넘게 지속되면서 이제 더 이상 내놓을 대책이 없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고백이다. 임 차관도 비슷한 심정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정부, 단숨에 잡을 묘안 없어 고민

연일 치솟는 물가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법석이지만 물가를 단숨에 잡을 묘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물가 상승세의 주요 원인은 국제 유가 상승, 구제역과 한파에 따른 농축산물 공급 부족, 전세 물량 부족에 따른 전셋값 급등 등이다. 하나같이 정부도 어쩔 수 없거나 하루 이틀 만에 해결책을 내놓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가격을 억지로 묶어놓을 수도 없다. 1980년대만 해도 정부는 물가를 직접적으로 통제했다. 당시 경제기획원 물가국 공무원들은 물가를 조사하는 시기가 되면 기업이나 소매상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가격을 올리지 말라고 요구했다.

다른 품목의 가격은 올려도 좋으니 조사 대상 품목만은 가격을 올리지 말라고 부탁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자주 벌어졌다. 다른 종류의 사과 가격이 다 올라도 부사 가격만 그대로면 물가상승률은 0%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당연히 국민이 느끼는 체감 물가와 지표로 나타난 물가 사이의 괴리는 지금보다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기업을 압박해 물가를 억누르려 한다는 비판은 공무원들을 더욱 힘 빠지게 한다. 그때 그 시절처럼 정부가 가격을 틀어쥐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매도당하니 억울하다는 것이다.

최근 정부가 취한 일련의 조치가 반시장적인 일로 비쳐질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석유 가격 결정 구조를 살펴보고 통신요금 인하를 요구하는 한편 정유 가공식품 업계에 대한 불공정 거래 행위 조사를 강화한 것 등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물가를 안정시켜 보려는 정부로서는 반시장적 조치라는 비판을 흔쾌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정부가 기업을 압박한다는 비판이 높아지자 임 차관은 “공무원이 기업 관계자를 만났다고 해서 무조건 ‘팔 비틀기’라고 하면 자리에 앉아서 탁상행정만 하라는 말이냐”며 강한 어조로 반박하기도 했다.

정부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물가대란의 책임을 피해갈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지속된 전 세계적인 저금리와 2009년 하반기부터 이어진 국내 경기 회복세 등을 감안했을 때 지금의 물가 상승세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위기에서 벗어나 경기 회복세를 견조하게 끌고 가는 일이 더 급하기는 했지만 물가 상승에도 대비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상기후에 따른 채소 값 급등 등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운 요인들도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했으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정부는 지난해 가을 배추 가격이 급등하자 이상기후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이라며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안정될 것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하지만 이상기후는 일시적인 일에 그치지 않았고 배추 가격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정부가 가격 상승 초기에 수입 물량을 늘리고 비축 물량을 풀었다면 이른바 ‘김치대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여지가 제한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가 대응하기에 따라 시장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유승호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us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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