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바치다

내가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는 그 어느 아버지보다 아들과 같이하는 시간이 많았다. 어릴 적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면 아버지는 언제나 집에 계셨다. 내가 장성해 취직한 후 회사에 갔다가 돌아와도 아버지는 언제나 집에 계셨다.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릴 때 잘 다니시던 직장을 그만두시고 30년 넘게 어머니의 약국을 도와 생활을 꾸려 오셨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어린 마음에 아버지의 직업을 물어보는 선생님의 질문에 뭐라 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에서 쉽지 않은 선택을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셨다. 어릴 적부터 효심이 아주 깊었다는 말씀을 얼마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로부터 자주 들어왔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걸음마를 뗄 무렵 아버지는 MBC 방송국에서 일하고 계셨다.

그즈음 할아버지가 암에 걸리셨는데 몇 년에 걸쳐 점차 암의 상태가 악화돼 결국 생사의 기로에 섰다. 몇 년간에 걸친 병수발로 우리 가족의 경제적인 부담이 만만치 않은 상태였으며, 결국 더 이상 입원비를 대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항암 치료를 더 받아야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는 절박한 상황. 아버지는 위급한 상태의 할아버지를 이대로 돌아가시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자신의 인생에서 쉽지 않은 선택을 하시게 된다.

몇 년간 잘 다니시던 방송국에 사표를 던지고 이때 받은 퇴직금으로 할아버지의 마지막 항암 치료비를 충당한다. 한마디로 한 가정의 모든 재산을 남김없이 쏟아 부은 셈.

하지만 이러한 효심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이러한 슬픔도 잠시, 우리 가족은 한순간에 집 안에 화장실도 없는 단칸 셋방에서 살게 된다.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나날이었으리라. 어머니는 가세가 기울어져 가는 상황을 보시면서 분명 마음 한쪽에 응어리가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우리 가족의 어려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점차 아버지의 선택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방식대로 모든 것을 바쳐 할아버지를 사랑했던 것이다. 부모 자식은 내리사랑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아버지의 할아버지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일반적인 내리사랑과 반대 방향인 치사랑으로, 내게 진정한 효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곱씹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아버지의 마음과 동화되기 위해 그와 같은 선택을 하신 후 아버지의 심정과 생활이 어떠했을까 헤아려 보았다. 당신의 가족에게 피치 못하게 가난함을 안겨주었다는 미안함에 그만큼 배로 열심히 어머니를 돕고 가정에 충실하고자 하셨을 것이고, 그 때문에 사회생활과의 단절을 감수하고 집과 약국만을 오가는 단조로운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아오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화려하지 않은 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까 하는 고민도 하셨을 것이다. 특히 아들에게만은 자랑스러운 아버지로서 기억되고 싶은 마음도 가지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택한 인생이었기에 누구에게 하소연 한 번 시원스레 하시지 못한 채 30여 년간 하루하루의 시간을 쌓아오셨으리라.

아마도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모르실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인생이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보기에 아버지의 인생은 모든 것을 바쳐 효심을 실천하셨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진실돼 보인다.


정동준 대한변리사회 공보 이사

서울대 전기전자제어공학과군을 졸업하고 2001년 변리사 시험에 합격했다. 현재 수(秀)특허법률사무소 대표이자 대한변리사회 공보이사로 정보기술(IT) 전문 변리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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