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에세이] 패자부활전

우연한 기회에 10년 전에 헤어진 지인을 만났다. 그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대기업을 운영하다가 실패한 뒤 조국을 떠나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 그동안 재기하기 위해 다시 사업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스포츠 경기에서는 패자부활전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사업에서는 실패한 기업인이 부활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이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아이폰 열풍을 일으킨 스티브 잡스는 패자부활전의 승리자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적 부진으로 자신이 창업한 애플에서 축출됐다가 13년 후 다시 복귀해 애플을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기업으로 탈바꿈시키지 않았는가.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사례를 아직 보지 못했다. 2000년대 초반, 소위 잘나가던 벤처기업 창업자들 가운데 몰락한 사람들은 많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재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미국에 있는 패자부활전이 왜 우리나라에는 없을까. 우선 금융권 대출 제도와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식회사라는 제도는 책임의 유한성을 전제로 존재하지만, 국내에서 주식회사가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을 때 대표이사인 경영자 개인에게 무한 책임을 요구한다.

개인 보증을 통해 법인이 부담하는 상환 책임이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부과된다. 따라서 기업이 파산하면 금융권 부채가 전부 상환되기 전에는 그 굴레를 영원히 지고 갈 수밖에 없다. 다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재산권 행사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주주들도 기업 파산에 따른 과도한 책임을 경영자에게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배임과 자금 유용 및 횡령 등의 민형사상 법적 분쟁이 기업 파산 이후에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법적 문제없이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를 다해도 기업 파산은 경영자 대부분을 범죄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경영자가 대주주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 결과 기업의 파산은 경영자에게 비즈니스만의 실패가 아닌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며, 이 때문에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필자의 지인처럼 조국을 떠나 해외에서 은둔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번 사업에 실패한 기업인에게 다시 도전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비단 비즈니스 영역뿐만 아니라 일상에서의 실패는 소중한 경험이고 배움의 기회다. 실패를 통해 얻는 경험적 지혜는 다른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지식재산이다.

한 번 실패한 경영자가 미래에 같은 실패를 반복할 확률은 적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험을 재활용하지 않고 사장시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사업 실패에 따라오는 과도한 사회적 비판은 벤처를 창업하거나 진취적으로 신규 사업을 통해 기업을 성장시키려는 기업인들에게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한다. 실패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크면 클수록 비즈니스 전반의 진취적인 분위기와 기업가 정신이 쇠퇴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업인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고, 많은 벤처 창업이 있어야 하며 창조적인 신규 비즈니스가 활발하게 시도돼야 한다. 대한민국 경제의 발전과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실패한 기업 경영자에게 패자부활전이 주어져야 한다.

패자부활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금융권의 대출 제도 개선, 사업 실패에 대한 사회적 용인, 재도전에 찬사를 보내는 사회적 분위기 등 우리 사회 전반의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최병인 이지스엔터프라이즈 사장

약력 : 1961년생. 84년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 졸업. 89년 미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기계공학 박사. 93년 맥킨지 및 액센츄어 근무. 2000년 효성데이타시스템 사장. 2002년 노틸러스효성 사장. 이지스엔터프라이즈 사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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