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이미지 버리고 적극적인 대외 활동 나서...기부 문화 전파, ESG 경영 등 새바람
[스페셜 리포트]언택트(비대면) 비즈니스가 보편화되면서 지난해 정보기술(IT) 기업들은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기업의 성장과 함께 한국 재계에서 IT 기업인들의 영향력도 점차 커지고 있다. 그간 재계의 ‘젊은 피’로 분류됐던 IT 경영인들이 주류로 입성하며 달라진 IT 기업들의 위상을 실감하고 있다.
대표적 IT 경영인인 김범수 카카오 의장과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단에 합류했다. 그간 전통적 산업 위주의 대기업 경영인들이 맡아 왔던 자리다. 이들의 합류는 향후 경제 단체와 재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것으로 보인다. 산업 구조 변화로 달라질 경제 단체들 서울상공회의소는 2월 24일 최태원 SK 회장을 신임 회장으로 선출했다. 서울상의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맡는 관례에 따라 먼저 서울상의 회장에 추대됐다. 한국 4대 그룹 총수로서는 처음으로 대한상의 회장을 맡게 된 최태원 회장은 3월 24일 대한상의 의원 총회에서 회장으로 공식 선출될 예정이다.
최태원 회장 취임과 함께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단에 새로운 인물들이 합류했다.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 김범수 카카오 의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박지원 두산그룹 부회장, 이한주 베스핀글로벌 대표, 이형희 SK SV위원회 위원장,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 등 7명이다.
이 중 IT 기업 경영자는 모두 4명으로, 김범수 의장, 김택진 대표, 이한주 대표, 장병규 의장 등이다. 장병규 의장은 게임 ‘배틀그라운드’를 낳은 인물로 유명하다. 20대 시절 1세대 포털 ‘네오위즈’ 창업을 시작으로 4차례 창업을 성공시켰다.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한주 대표는 1998년 웹 호스팅 기업 ‘호스트웨이’를 창업했다. 2015년 클라우드 관리 솔루션 기업 ‘베스핀글로벌’을 창업했고 현재 ‘스파크랩스’를 통해 창업 지원을 하고 있다.
신규 부회장단은 4차 산업혁명과 산업 구조 변화 흐름에 맞춰 IT·스타트업·금융 분야 기업인들이 대거 합류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김범수 의장과 김택진 대표는 최태 회장의 제안에 따라 부회장단 합류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서울상의 부회장단에는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 권영수 LG 부회장, 공영운 현대차 사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등이 참여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 경제를 이끌어 온 전통적인 주요 대기업 경영자들이다. 여기에 최태원 회장 취임과 함께 IT·스타트업 대표들이 회장단에 대거 합류함으로써 그간 움추렸던 경제 단체들도 새로운 추진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합류는 IT 기업의 위상이 과거와 달라졌음을 잘 보여준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 경제의 산업 구조 자체가 바뀐 것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IT 등 첨단 산업의 비율은 현재 한국 경제 비율의 60% 이상을 차지하는데 이 기업의 경영자들이 전면에 진작 나섰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기업 시가 총액으로도 확인된다. 한국 유가증권시장에서 최근 10년간 IT 분야 기업들은 급부상했지만 조선·건설 등 산업재 기업들의 비율은 낮아졌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2000년 말과 2010년 말, 2020년 3분기 말의 유가증권시장의 시가 총액 상위 100대 비금융사의 변화를 분석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연도별 시가 총액 100대 기업을 업종별로 나눠 비교할 때 2010년 대비 2020년 가장 큰 폭으로 기업 수가 증가한 업종은 ‘건강 관리’였다. 그 뒤를 이어 ‘IT’는 8개에서 15개로 늘며 둘째로 기업 수가 많이 증가했다. 시가 총액도 크게 늘었다. IT 기업들의 시총 합계는 592조원으로 업종별 시총 합계 중 가장 많았다. 특히 시총 1위 기업인 삼성전자를 제외해도 IT 기업의 시총 합계는 245조원에 달했다. 시총 증가율 또한 2010년 말 대비 2.9배로 건강 관리 다음으로 높았다.
특히 지난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유행)으로 IT 기업들의 성장이 두드러진 해였다. 전 산업군이 진통을 겪었지만 IT 기업은 예외였다. 기업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가 한국의 시가 총액 500대 기업 중 2월 15일까지 잠정 실적을 공개한 326개 기업의 경영 실적을 분석한 결과 IT·전기전자 업종의 지난해 총영업이익은 47조9882억원으로, 1년 사이 13조3923억원이 늘어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다. 언택트 산업의 성장으로 직접적인 수혜를 본 것이다. 반면 지주사·조선·자동차&부품·철강 등 대부분의 산업군은 영업이익이 감소했다.
'언택트’로 크게 성장한 IT 업종과거 ‘젊은 피’ 이미지가 강했던 IT와 테크 경영인들은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대기업 총수와 같은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안게 됐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는 와중에 일부 기업인들이 개인 재산 기부 의사를 밝히며 재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카카오를 창업한 김범수 의장은 지난 2월 8일 자신의 재산을 절반 이상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범수 의장은 이날 카카오와 계열사 전 임직원에게 보낸 신년 카카오톡 메시지에서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기부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규모는 약 5조원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범수 의장은 또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할지는 이제 고민을 시작한 단계”라면서 “카카오가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을 찾고 지원해 나갈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2월 25일 김범수 의장은 사내 직원 간담회인 ‘브라언톡 애프터’를 통해 재산 기부금에 대한 사회 환원 방식에 대한 직원들의 의견을 들었다.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은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며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더기빙플레지’ 기부를 선언했다. ‘더기빙플레지’는 2010년 8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이 재산 사회 환원 약속을 하면서 시작된 자발적인 기부 운동이다. 기부 서약 신청자의 재산 형성 과정과 실사·기부 의지에 대한 진정성에 대한 심층 인터뷰, 평판 조회 등 까다로운 심사 자격을 거친 뒤 서약자를 기빙플레지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김 의장은 2월 18일 기빙플레지 서약자로 공식 인정 받았다. 김 의장은 “2017년 100억원 기부를 약속하고 이를 지킨 것은 지금까지 인생 최고의 결정이었다고 생각하며 이제 더 큰 환원을 결정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또 “존 롤스의 말처럼 ‘최소 수혜자 최우선 배려의 원칙’에 따라 그 부를 나눌 때 그 가치는 더욱 빛난다”며 “교육 불평등에 관한 문제 해결,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 자선 단체들이 더욱 그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돕는 조직을 만드는 것을 차근차근 구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봉진 의장은 2017년에도 100억원의 기부를 약속한 뒤 이듬해인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사랑의열매·초록우산어린이재단·대한의료사회복지사협회 등 재단·협회를 비롯해 월드투게더·밥퍼나눔운동본부·서울예술대학과 같은 비정부기구(NGO)와 학교에 총 100억3100만원을 기부하며 약속을 지켰다.
지금은 IT를 넘어 한국 경제계를 이끄는 주역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고 ‘창업 신화’를 썼다. 김봉진 의장은 기빙플레지에 공개한 서약서를 통해 “대한민국에서 아주 작은 섬에 태어나 고등학교 때는 손님들이 쓰던 식당 방에서 잠을 잘 정도로 넉넉하지 못했던 가정 형편에 어렵게 예술 대학을 나온 제가 이만큼 이룬 것은 신의 축복과 운이 좋았다는 것으로밖에 설명하기 어렵다”며 기부 결심의 이유를 밝혔다. 1세대 IT 창업가로 꼽히는 김범수 의장도 어려운 가정 형편을 딛고 카카오를 창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부의 세습이나 경영권 승계 대신 자신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회에 기부로 도움을 주고자 했다.
과거 대기업의 기부는 ‘기부’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일부 기업인들의 기부는 검찰 수사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후 ‘면피용’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IT 기업인들의 기부는 과거와는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김태기 교수는 “IT 기업인들의 잇단 기부는 기부금이 어떤 형태로 쓰일지 연구와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는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다르다”고 분석했다.
김범수 의장이 구성원들과 함께 기부 방식을 고민하겠다고 한 것도 보다 효과적인 기부금의 쓰임을 위해서다. 기업이 직접 운영하는 재단이 아닌 전문 기부 단체를 통했다는 것도 과거와는 달라진 점이다. 김봉진 의장은 까다로운 기빙플레지 가입 절차를 통해 기부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알리고 향후 교육 불평등 문제,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 자선 단체를 돕는 조직을 만들 것이라는 구체적 계획을 알렸다. 김태기 교수는 “경영인들이 사유 재산 기부를 통해 어떠한 방향에서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인 기부”라고 말했다.
자산 기부, ‘ESG 경영’에도 앞장선다 최근 젊은 IT 기업들은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카카오는 1월 12일 이사회를 열고 이사회 산하에 ‘ESG위원회’를 신설하기로 의결했다. 위원회는 김범수 의장, 최세정 사외이사, 박새롬 사외이사로 구성된다. 같은 날 카카오는 지속 가능 경영 활동의 초석이 돼 줄 ‘기업지배구조헌장’도 제정, 공표했다. 기업지배구조헌장에는 주주·이사회·감사기구·이해관계인·시장에 의한 경영 감시 등 5개 영역에 대한 운영 방향과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이사회의 감독 아래 경영진은 책임 경영을 수행하고 건전한 지배 구조를 확립하고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선언적 의미를 담았다.
카카오는 이에 앞서 기업의 사회적·디지털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1월 4일 구성원과 비즈니스 파트너의 인권 보호, 이용자의 정보 보호,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의무, 디지털 책임, 친환경 지향 원칙을 담은 ‘인권경영선언문’을 대외에 공개했다. 이는 업계에서 선제 조치로 평가받고 있다. 또 지난해 7월에는 아동·청소년 문제에 대해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반영해 아동·청소년 성보호와 관련된 금지 행위 조항을 운영 정책에 추가했다.
네이버는 지난해 10월 이사회 산하에 ‘ESG위원회’를 설치했고 같은 해 12월 ESG 전담 조직을 구성했다. 지난 1월 20일에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이 진행한 ‘2020년 기업 지배 구조 평가’에서 시총 10위 기업 중 유일하게 지배 구조 부문에서 ‘A+’ 등급을 받았다.
친환경에도 앞서고 있다. 네이버는 강원도 춘천의 데이터센터 ‘각’과 세종시에 완공될 제 2데이터센터의 탄소 저감 솔루션을 통해 2040년까지 ‘카본 네거티브’를 달성한다. 카본 네거티브는 온실가스 배출량보다 더 많은 양의 탄소를 감축해 상쇄함으로써 순배출량을 0 이하로 만드는 것이다. 향후 제2 데이터센터까지 완공되면 탄소 배출량이 급증할 수 있는데 탄소 감축을 통해 기후 변화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