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문사철(文史哲) 콘서트] 내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야

욕망의 판타지 혹은 여가의 사회학

얼짱, 걸 그룹, 에스라인, 킬힐, 명품 등은 모두 우리 시대의 미디어가 유포하고 소비하는 ‘욕망의 판타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망이 판타지를 만들고 판타지가 욕망을 만들기도 합니다.

TV를 켜면 욕망하는 판타지들이 시청각을 자극합니다. 욕망의 판타지 역시 자율적인 주체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만 따져보면 그것은 미디어에 따른 ‘타자화된 욕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한창 휴가철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휴가를 계획하고 있습니까. 혹시 그 휴가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거나 위화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주위의 동료들이나 미디어를 통해 해외 여행지에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고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는지요.

TV에서 해외로 떠나는 여행객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를 내보내면서 산호초 바다에서 낭만적인 휴가를 ‘소비’하는 장면을 보여줄 때 그런 휴가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코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여름에 워터파크 못 가면 허전한 이유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여가를 소비의 입장에서 접근하면서 사람들은 ‘여가로부터 소외’를 겪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여가도 상품이기 때문에 ‘위세’와 ‘차이’를 소비하는 행위로 봅니다.

그런데 소비사회에서는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여가 시간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과 얼마나 ‘차이 나는 소비’를 할 수 있느냐가 항상 따라다니기 때문이죠.

문제는 차이 나는 소비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억압되고 강박 당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가로부터의 소외’가 일어난다고 보드리야르는 주장합니다.

예컨대 해외 유명 관광지로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은 “해외 휴양지에서 휴가를 누리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 보도를 접할 때 소외를 느낍니다. 골프를 할 여유가 없는 직장인들은 골프장 장면만 나와도 우울과 함께 위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소비사회는 모든 구성원에게 친절하게 여가를 소비할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진정한 배려가 아니라 소비를 부추기는 그런 배려인 셈이죠.

가정에 배달되는 백화점의 전단지, 여행 상품을 알리는 광고, 골프나 헬스클럽 광고 등이 불쑥불쑥 일상을 파고들어 소비할 것을 권합니다. 차이의 욕구와 그 충족을 위한 소비사회의 배려인 것이죠. 이렇게 되면 ‘순수한 향유’가 아니라 ‘향유의 강제’가 되고 맙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소비사회에서의 소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상품을 소비하므로 자율적인 주체의 자유로운 활동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소비사회에서는 물건이 합리적 수요에 따라 공급되던 시대가 지나고 ‘인위적 소비’를 촉진하는 디자인·광고 등이 수요를 의도적으로 창출한다고 봅니다. 누가 광고 모델이 되었느냐에 따라 상품이 가치와 권위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질 좋은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미디어에 의해 광고되거나 인기 있는 광고 모델을 ‘동원’하지 못하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교환가치가 아니라 이미지나 디자인·미디어 광고에 따른 의미 작용 등 기호 가치가 중요하다는 거죠.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에서 개인으로서의 존재는 기호의 조작과 계산속에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즉, 소비의 진정한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기호의 질서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인은 상품의 구입을 통해 ‘사물(내용·질)’이 아니라 ‘기호(이미지·껍데기)’를 소비한다고 보드리야르는 주장합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욕망은 무엇보다 ‘차이’에 대한 욕망입니다.

이러한 차이의 소비 역시 자발적인 선택인 것처럼 보이지만 미디어에 의해 ‘매개’ 혹은 조장된 사회적 의미에서의 욕망의 반영물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매개를 통한 욕망은 언뜻 보기에 개인적 만족과 향유를 위해 물건을 소비하는 것 같지만 타자의 욕망일 뿐 우리 자신의 주체적 욕망이 아닌 것이죠.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며 데카르트의 명제를 변형시킵니다. 기호와 이미지를 소비하는 소비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른바 ‘소비인간’은 끊임없이 소비에 강박당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소비사회에서 사람들은 상품이나 여가뿐만 아니라 주거에서도 억압당하고 소외를 겪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한 아파트 광고 문안은 명품 브랜드 전략으로 ‘차이의 소비’를 홍보합니다.

이때 명품 아파트를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광고는 억압과 배제, 소외를 경험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가 명품 아파트를 추구하는 배경에는 바로 ‘자본의 전략’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아파트가 그 아파트’이듯이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미디어와 광고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욕구는 허위의 욕구이며 상상된 욕구입니다. 빌헬름 라이히는 이를 ‘창조된 욕구’라고 했고 칼 마르크스는 이것을 자연스러운 욕구가 아니라 ‘사치스러운 욕구’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허위 욕구와 창조된 욕구는 이른바 ‘잉여 쾌락’에 의해 지속됩니다.

즉, 아무리 명품이라고 하더라도 막상 갖고자 하는 대상을 손에 넣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큰둥해지죠. 다시 새로운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의 결핍을 좇아 다시 명품을 욕망하게 됩니다. 욕망을 충족하는 순간 다시 다른 것을 욕망하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이 욕망의 결핍이 ‘잉여 쾌락’입니다.

욕망은 영원히 만족되지 않아

슬라보예 지젝은 소비사회로 지칭되는 후기 산업사회는 ‘잉여 쾌락’이라는 욕망의 구조에 의해 유지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에너지이자 현대 소비사회를 지탱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거죠. 잉여 쾌락은 고전경제학의 ‘잉여가치’를 대체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소비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긴장시키며 명품·건강·젊음·날씬함·휴가·레저·유행 등등에서 차이의 소비를 쫓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됩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피투체(被投體), 즉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소비사회에는 ‘미디어에 의해 내던져진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미디어가 주체가 되고 렌즈를 통해 수많은 객체를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은 렌즈에 의해 만들어진 객체를 모방하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소비사회에서 개인의 욕망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체적으로 소비하고 여가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혹은 여름휴가 문제로 ‘여가로부터의 소외’를 겪으며 우울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아무튼 휴가를 잘 보내시려면 TV와 인터넷 등 미디어를 조심하시고 가능하면 휴가 시즌 동안만 ‘거리 두기’를 권합니다. 지금은 미디어가 독해 체계의 제국주의를 만들고 있는 시대이니까요.

“지배하는 것은 믿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바로 이미지다. 이미지는 믿게 한다.” 프랑스 매체학자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시청자는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것만 믿게 되는 ‘집단적 무사고’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드브레는 “텔레비전은 이미지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미지 제국주의’를 만든다”면서 미디어가 이미지로 지배하는 현상을 ‘텔레비전 섭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대중매체의 공론은 사람들의 이러한 불안을 탐지하고 계속되는 불안을 위한 새로운 자극거리를 찾아 나선다.” 노르베르트 볼츠는 ‘보이지 않는 것의 경제’에서 “대중매체, 특히 TV는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나아가 “대중매체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한다”고 말합니다.

대중매체의 자극에 사람들은 더욱 더 ‘소비인간’이 되고 다른 사람과 차이 나는 소비를 하기 위해 애쓰는 거죠. 이미지에 속지 마세요. 미디어가 확대재생산하는 욕망의 판타지에 속지 마세요.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비교문학 박사.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roma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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