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essional Life] “젊은 거장, 노래와 연기로 세계를 울리다”

바리톤 이응광


록 밴드와 성가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한쪽은 세상을 향해 거칠게 소리 지르고, 한쪽은 신을 향해 경건한 찬양을 드린다. 같은 ‘음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극과 극을 달리는 소리다. 하지만 이 상반된 노래들을 통해 음악의 갈증을 풀곤 했던 소년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이응광 씨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가 좋았어요. 아주 어릴 때는 신승훈의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고, 그러다 고등학생 무렵에는 ‘헤라클래스’라는 지역 록 밴드에서 보컬로도 활동했었죠. 인근 여고와 교도소까지 공연하러 다닐 정도로 꽤 인기가 좋았다니까요?”(웃음)

주중에는 그렇게 록 음악에 심취해 있다가도 주말이면 성가대에서 그 누구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찬송가를 불렀다. “중학생이 되던 무렵부터 성가대에 들고 싶어 안달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성가대 활동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가요를 부르건, 록을 부르건, 찬송가를 부르건 그에겐 늘 한결같은 칭찬이 쏟아졌다. “소리가 좋다. 그냥 썩히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칭찬들이었다.

“그래서 철이 들면서부터는 자연스레 아, 노래를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하지만 환경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그가 중학생일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혼자 몸으로 1남 3녀의 뒷바라지를 하셨다.

“고향이 경북 김천이에요. 시골이다 보니 당연히 세계적인 음악가나 성악가가 되겠다는 제 꿈이 얼마나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렸겠어요.”

노래는 무슨 노래냐며, 얌전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라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단식투쟁에 눈물 바람을 더하며 결국 어머니를 설득했다.

그 후 십여 년이 훌쩍 넘은 오늘날까지 그의 어머니는 매일같이 새벽기도를 다니며 그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인지 지금까지 정말 좋은 인연들을 만났고, 그 인연들이 지금의 저로 이끌어 준 것 같아요.”

조건 없는 사랑과 기대가 키운 성악가

시골 출신, 그것도 뒤늦게 시작한 음악 공부, 넉넉하지 못한 집안…. 성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조건들이었다.

하지만 인근에 워낙 자자할 정도로 좋은 소리,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기에 기회는 쉽게 그를 찾아왔다. 음대를 목표로 레슨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된 그에게 김천전문대의 모 교수가 바리톤 성악가를 소개해 줬다.

서울에서도 바삐 활동하던 성악가는 가난하지만 재능이 넘치는 소년에게 거의 무료에 가까운 레슨비로 아낌없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 덕분에 1년 반 정도의 레슨만으로 서울대 성악과에 장학금을 받으며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에서 공부하면서도 성가대와 아마추어 합창단 활동을 하곤 했었어요. 그저 노래가 좋아, 노래 부르는 것에만 열중했죠.” 학비를 벌기 위해 주말이면 결혼식 축가를 부르러 다니기도 했다.

그런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아까워 한 이들이 그에게 먼저 유학을 권했다. 아마추어 합창단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과 그의 모교인 김천 성의고등학교 동창회에서도 그의 꿈을 위한 지원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5년에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후원 음악회 등을 열어주신 그분들의 성원 덕분이었어요.” 자신을 믿고 지원해 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유학을 간 후에도 잠시 쉴 틈이 없었다. 동료 학생들은 짬이 나면 파티를 하랴, 놀러 다니랴 학창 시절의 즐거움을 만끽하곤 했지만 그에게는 늘 공부와 연습이 먼저였다.


유학 시절 그 흔한 여행 한 번 다닌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의 화려한 이력이 된, 수없이 많은 국제 콩쿠르에서의 수상 기록도 그의 고달픈 유학 생활에서 비롯된 땀과 노력의 결과였다.

독일 알렉산더 지라르디 콩쿠르 우승을 비롯해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 페루치오 탈리아비니 콩쿠르, 리카르도 잔도나이 국제 성악 콩쿠르 등 10여 회가 넘는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아 나갔다.

특히 연기력과 표현력에 대한 칭찬들이 줄을 이었다. 분명히 생김새는 전형적인 동양인 데다가 체구 자체도 서양 가수들에 비해 가냘플 정도지만 눈을 감고 들으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정확한 발음과 발성을 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정확한 발음이나 표현력을 익히기 위해 일부러 이탈리아 노래를 배울 때면 이탈리아 친구들과, 독일 노래를 익힐 때면 독일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이야기하며 그들의 발음이나 표현력을 세밀하게 공부하곤 했었어요.”

그런 그의 노력을 남달리 평가하던 베를린의 스승은 그가 2008년 리카르도 잔도나이 국제 성악 콩쿠르에서 우승한 직후 그에게 스위스 바젤 오페라 하우스의 오디션을 권유했다. “‘저 우승했습니다’라고 전화 드렸더니 바로 스위스로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오디션 장에서 연달아 2곡을 부르고 난 그에게 오페라단의 총감독은 ‘모차르트 1곡을 더 부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노래를 끝낸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바로 함께 일하자는 파격적인 제의를 해 왔다.

“그리고 바로 그 시즌부터 바젤 오페라 하우스 무대에 서게 됐죠.” 이후 그는 스위스 바젤 오페라 하우스의 전속 가수로 바젤 오페라 하우스만이 아니라 많은 유럽의 오페라 무대에서 역량을 발휘했다.

오페라 ‘라보엠’에서 마르첼로 역으로 유럽 데뷔에 성공한 이후 오페라 ‘리골레토’, 오페라 ‘나비부인’, 체코 야나첵의 오페라 ‘죽음의 집으로부터의’ 등에 출연하며 드라마틱한 연기력, 개성 넘치는 캐릭터 해석, 과감한 표현력 등에 대해 극찬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작년에 스위스에서 14회 전회 공연이 매진됐던 ‘피가로의 결혼’의 피가로 역은 오페라 팬들에게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정도다.

꿈을 향해 날개는 쉬지 않는다

“저 역시도 개인적으로는 피가로 역을 좋아해요. 해학적이면서도 위트가 넘치고 개성적인 피가로야말로 지금의 제 나이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역할 같아서요. 또 바리톤의 매력을 잘 나타나게 해 주는 역이기도 하고요.”

지금까지처럼 내년 시즌에도 그는 계속 바쁠 예정이다. 베르디의 ‘아이다’, 차이콥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등 벌써부터 예정돼 있는 오페라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를 기다리는 건 해외 무대만이 아니다.

지난 2007년 국립 오페라단에서 ‘라보엠’의 마르첼로 역으로 국내 데뷔한 후 국내에서도 그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온 것도 휴가 차 들어온 거였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도 공연만 하다가 다시 들어가게 생겼어요.”(웃음)

휴식을 위한 귀국이었지만 ‘점자 성경을 후원하기 위한 자선 음악회’와 지구 사랑을 위한 ‘녹색 환경 음악회’ 등 취지가 좋은 공연인 만큼 몸을 사릴 수 없었단다.

“제가 많은 분들의 성원과 사랑을 받고 이 자리에 온 만큼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죠.”

또한 그 때문에 그는 언젠가 메트로폴리탄, 라 스칼라 같은 큰 무대에 서게 될 그날을 꿈꾼다.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성악가로서 훌륭한 공연을 선보이는 것만이 그를 향해 아낌없는 사랑과 성원을 보내준 많은 이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약력 : 1981년생. 서울대 음대 졸업. 서울대 대학원 졸업. 독일 베를린 한스아이슬러 음대 졸업. 2004년 한국성악콩쿠르 우승. 2005년 동아콩쿠르 2위. 2006년 독일 알렉산더 지라르디 국제 성악 콩쿠르 1위. 2010년 4월 서울국제음악콩쿠르 2위 입상. 스위스 바젤 오페라하우스 오페라 ‘나비부인’, 체코 야나첵의 오페라 ‘토텐하우스’ 출연. 스위스 바젤 오페라하우스 전속 가수(현).

김성주 객원기자 heliet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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