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현 장관이 IMF 총재를 혼냈지만 …

경제부처 24시

“10여 년 전 아시아 금융 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은 아시아인들에게 큰 두려움을 줘 ‘미스터 스트릭트(Mr. Strict:엄격함)’로 불렸고 대규모 구조조정에 따라 ‘나는 해고됐다(I Am Fired)’의 준말로도 불렸다. 이제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미스터 라이트(Mr. Right:올바름)’가 되기를 바란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7월 12일 재정부와 IMF 공동 주최로 대전에서 열린 ‘아시아 컨퍼런스’ 만찬에서 던진 뼈 있는 농담이다. 1990년대 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금융 위기를 극복하고 IMF가 권고한 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었음을 상기시키면서 IMF의 반성과 변화를 요구한 것이다.

윤 장관은 이 행사에서 “IMF가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이나 거시 경제 안정을 위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윤 장관의 적극적인 공세 때문이었는지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총재는 “외환위기 때 아시아에 대한 IMF의 정책 처방이 일부 잘못된 측면이 있었다”며 과거의 잘못을 시인했다.

외환위기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 한국인들로서는 한편의 통쾌한 복수극이었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딛고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위상도 높아졌기에 연출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이 전반적으로 선진국보다 빠른 경제 성장세를 보이면서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점도 윤 장관이 보인 자신감의 배경이다.

한국 장관이 IMF의 잘못을 거침없이 지적하고 IMF 총재가 결국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면 한국이 다시는 외환위기 때와 같은 굴욕적인 일을 당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는 엄연히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고 그런 면에서 아직 한국의 국력은 IMF를 마음 놓고 다그칠 만한 수준에 못 미친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의 ‘통쾌한 복수극’ 평가 나와

스트로스-칸 총재는 7월 초 미국 워싱턴에서 아시아 지역 기자들과 가진 회견에서 “한국인이 IMF 총재가 된다면 환영한다”면서도 “예전부터 IMF 총재는 유럽에서 나와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에 전적으로 찬성하며 신흥국이나 저소득 국가에서는 20년 후에나 IMF 총재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이 양분하고 있는 세계경제의 패권을 아무렇게나 다른 국가에 내주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는 의결권 재배분을 비롯한 IMF의 지배 구조 개혁 문제를 다룰 예정이지만 한국 등 신흥국의 권한이 얼마나 강화될지는 미지수다. 신흥국의 경제 규모가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17%의 지분을 갖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쉽사리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는 있지만 이들이 여전히 수출 주도의 경제성장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선진국들이 소비 시장 역할을 하면서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품을 사 줘야만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스트로스-칸 총재도 ‘아시아 컨퍼런스’에서 그런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그동안 아시아 신흥국들은 수출에 많이 의존해 왔지만 이제 판도가 바뀌었다”며 “유럽 등 다른 지역의 성장이 둔화돼 수출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위기에 빠지면 한국은 어쩔 수 없이 IMF의 혹독한 긴축과 구조조정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은 다시금 경기 침체와 대규모 실업의 수렁으로 내던져질 수 있다.

경제 관료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fundamental)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 있다. 재정 건전성이나 기업 경쟁력 등 기초 체력이 튼튼하기 때문에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낮다는 의미다. 그러나 1997년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직전에도 경제 관료들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튼튼하다”고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도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원·달러 환율은 1600원 근처까지 치솟았고 은행들은 극심한 외화 자금난을 겪었다. 펀더멘털이 튼튼하다고 하는데도 위기가 반복됐다는 것은 이미 펀더멘털 자체가 튼튼하지 않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유승호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us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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