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회 파행이 ‘모라토리엄’ 선언 원인?

‘모라토리엄’ 선언, 성남시에 무슨 일이

지난 6월 4일 헝가리에서는 신임 총리(빅토리 오르반)의 대변인(페테르 스지자르토)이 기자회견에서 “경제가 심각한 위기”라며 “국가 디폴트 가능성이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디폴트(default)’는 이른바 국가 부도로 ‘빌린 돈을 갚을 수 없으니 알아서 하시오’라는 뜻이다. 당시 ‘피그스 국가(PIIGS:포르투갈·아일랜드·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에서 시작된 유럽발 금융 위기에 대한 우려가 전 세계 금융시장을 짓누르던 때였다.

‘디폴트’라는 언급 한마디에 미국 다우존스지수는 323.31포인트(마이너스 3.15%)가 하락하며 순식간에 1만 선이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4월 총선에서 승리한 피데스(청년민주동맹)가 이전 집권당인 사회당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修辭)였던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경제가 어렵기는 하지만 디폴트는 과장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 시장도 ‘갚는 데는 문제없다’ 한발 물러서

한 달 뒤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지난 7월 12일 신임 이재명 성남시장은 갑작스레 연 기자회견에서 “판교특별회계에 있어야 할 5400억 원이 남아 있지 않아 갚을 수 없으니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모라토리엄은 ‘지금은 못 갚지만 일정 기간만 유예해 주면 갚겠다’는 것으로 ‘돈을 못 갚겠다’는 디폴트와는 다르다. 개인에 빗대어 보면 디폴트(파산)가 되면 도망을 다녀야 하지만, 모라토리엄은 법원이 채무를 일시 중지시키는 개인 회생 절차에 비유할 수 있다.

헝가리의 디폴트 언급이 글로벌 금융시장에 충격을 준 것만큼이나 성남시의 모라토리엄 선언은 국내에서 정치사회적 파장이 컸다. 순식간에 지방자치단체(지자체)의 호화 청사 논란과 지방 재정 위기가 핫이슈로 떠올랐고 모라토리엄의 가능성 여부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이 시장이 언급한 판교특별회계란 공동 공공사업비 2300억 원, 초과 수익 부담금 2900억 원 등 총 5200억 원을 말한다.

이 시장에 따르면 전임 시장과 집행부가 판교특별회계에 있는 돈을 일반회계에 가져다 썼다고 한다. 공원로(도로 명칭) 확장 공사에 1000억 원(2007년), 도촌~공단로 간 도로 공사 등에 1000억 원(2008년), 예산 조기 집행 관련 투자 재원 1000억 원(2009년), 세입 감소에 따른 일반회계 지원 1000억 원(2009년), 은행2동 주거 환경 개선 사업 정비 기금 1400억 원(2009~2010년) 등으로 모두 빠져나간 상태다.

LH와 국토해양부, 그리고 지자체의 감독 권한이 있는 행정안전부는 성남시장의 얘기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판교특별회계에서 LH와 국토부에 갚을 금액이 5400억 원이지만 올해 갚을 금액은 1000억 원에 불과한데, 이것 때문에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것은 전임 시장을 공격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 쇼’라는 것이다.

성남시의 올해 예산은 1조7577억 원이다. 그러나 이 시장은 “세수가 줄어 지난해보다 예산이 5344억 원 줄었고 앞으로도 세입 전망이 불투명하다. 또 5200억 원이면 금년 일반회계의 45%에 해당하고 가용 예산의 1.5배에 달한다. 이를 일시 변제하면 일반 사업을 도저히 할 수 없게 된다”고 얘기했다.

이 시장 입으로도 ‘올해 갚아야 할 금액은 1000억 원’이라고 해 놓고 ‘(갚아야 할 총액인) 5200억 원은 금년 일반회계의 45%, (금년) 가용 예산의 1.5배’라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다.

이 시장도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법률상 의무금을 지급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은 아니다. 파산한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다. 모라토리엄은 지급 유예지 디폴트가 아니다. 당장 못주겠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했다.

이 시장의 의도대로 지불유예가 될지는 미지수지만, 정치적 승부에서는 이 시장의 판정승으로 보인다. 일단 전임 집행부가 방만한 살림살이로 재정을 파탄 냈다는 것을 알리는 데 성공했고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한나라당 지자체장이 주도했던 호화 청사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시의회, 아직 원 구성 못하고 대립

한편 이 시장이 이렇게까지 앞서 나간 데는 성남시의회가 여소야대(시장은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고, 시의회는 한나라당이 다수인 상황)인 것이 배경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 2006년 선거에서 성남시의회는 한나라당이 20석, 민주당이 13석을 차지했다. 2010년 선거에서 정권 심판론에 힘입어 수도권에서 대거 민주당이 지방정권을 잡고 의회도 장악했지만 성남시의회는 한나라당 18석, 민주당 15석, 민주노동당 1석(총 34석)으로 한나라당이 우세하다. 이 시장으로서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한나라당의 견제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성남시의회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아직까지도 원 구성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의장·부의장·상임위를 정해야 하는데 한나라당이 다수당임을 내세워 민주당이 내세우고 있는 원 구성 협상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은 양당 교섭단체 대표단 협의 과정을 통해 의장과 부의장 중 1석, 행정기획위원회와 경제환경위원회 중 1석(상임위원회), 문화체육복지위원회와 도시건설위원회 중 1석(상임위), 예결위원회와 윤리위원회 중 1석(특별위원회)을 요구하고 있다.

2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의회에서 시의회 민주당.민노당.국민참여당 등 야당의원들이 회의장에 들어가려는 한나라당 소속 김대진 의장을 온몸으로 막고 있다. 2010.01.21 /양윤모기자yoonmo@hankyung.com
반면 한나라당은 부의장 1석, 상임위 4개 위원회 중 1석, 특별위원회 3개 중 윤리위원회를 포함한 2개를 주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양측이 조금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면서 시의회는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다.

민주당은 의석이 2석(민주노동당 포함)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강조하면서 한나라당이 최소한 상대 당이 인정할 수 있는 안을 내놓지 않고 있어 협상 의지가 없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이 다수당의 존재를 부정하고 5 대 5의 의석 비율을 요구하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고 민선 5기 이 시장과 시 집행부를 견제하기 위해선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피력했다.

이런 배경을 봤을 때 이 시장으로서는 의회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자신의 뜻을 펼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시장의 결정→의회의 승인’이라는 정상적인 절차보다 여론을 움직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방법을 앞으로도 계속 써야 하는 것이다.

이 시장이 선언한 모라토리엄 그 자체도 의회의 승인 없이는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이 시장은 지방채 발행 등을 통해 천천히 갚아 나가겠다는 계획을 밝혔는데, 이것도 다수당인 한나라당 시의원들이 찬성해야 가능한 일이다.

한편 성남시의회 민주당협의회는 앞으로 전임 시장과 집행부의 만행을 낱낱이 들춰 공개하겠다고 전의를 다지고 있다. 민주당협의회는 “지난해 행정감사 때도 판교특별회계에서 일반회계로 전용한 부분에 대해 민주당이 지적했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

신청사를 지을 때도 한나라당이 민주당을 배제하고 날치기 통과시켰다. 퇴임 시기에 맞춰 2년 반 만에 후다닥 지은 것도 문제다. 공사 과정에서 부실 공사 의혹이 없는지, 공사비가 과다 책정된 것은 아닌지 철저히 따져보겠다.

또 판교특별회계를 끌어다 쓴 돈이 대개 토목공사 위주의 사업이다. 왜 토목 사업에 우선순위를 두고 급하게 한 것인지도 의혹투성이”라고 밝혔다.

판교특별회계는 이미 성남시의회 내에서는 오래 묵은 논란이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성남시의회 한나라당협의회의 입장을 듣고 싶었지만 간사를 비롯한 의원들은 여러 차례의 통화 시도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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