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아빠와 신나게 춤 좀 추자”

아버지는 할아버지셨다. 우리 집의 절대 권력자였던 아버지. 47세에 본 늦둥이 딸이었기에 내 기억 속에 ‘일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없다. 언제나 술에 취해 휘청거리시던 아버지.

아침마다 주발에 따끈한 정종이 어머니의 약지 손가락 온도계로 조절되어 아버지의 밥상에 올랐고, 진지 드시기 전 습관처럼 한숨에 주발 속 정종을 들이켜시곤 수염 난 턱 전체를 오른손으로 쓸어내리며 나오는 행복한 효과음 ‘캬~~아.’

예산 읍내 시장 통에 살았던 우리 집은 아버지가 술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에도 개천 건너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선술집들. 쌀장사하시는 어머니는 언제나 분주하셨지만, 가게 앞 평상에 깨끗한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으신 아버지는 오고가는 사람을 잡아 술 드시는 일이 소일이자 취미셨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으레 “최가 놈아, 김가 놈아 나는 정씨고 너는 김가다, 이놈아”를 연발하셨다. 그 덕분에 난 코흘리개 계집아이 때부터 ‘가’와 ‘씨’의 낮춤말, 높임말을 알 수 있었다.
술에 취하면 내 볼에 비비시던 아버지의 까칠까칠 구둣솔 같던 수염. 뾰족뾰족한 그 수염은 내 얇은 볼을 찌르기 일쑤였지만, 취해서야만 예뻐 어쩔 줄 모르며 사랑을 표현하셨다. 그래서 나에겐 술 냄새가 아버지 냄새다. 아버지는 기억의 시작부터 끝까지 술 냄새였다.

그러니까 정확히 1971년 3월 31일.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처음 학력평가 시험이 있기 전 어머니의 생신날이었다.

언제나처럼 술에 빠져 비틀거리시던 아버지가 초저녁에 안방에서 나를 부른다. 장지문 하나 사이 윗방에서 두레상을 펴놓고 공부하던 난 그 시절 사춘기여서였을까, 술에 빠져 사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언니들에겐 서슬 시퍼런 호랑이셨던 아버지도 세월의 약에는 어쩔 수 없어 늦둥이 딸년에게는 이빨 빠진 호랑이셨다. 보기만 하셔도 하하, 소리만 들어도 허허. 기분 좋은 밤이면 언제나 아버지의 기쁨조가 되어 춤추고 노래하던 딸이 나였다.

그날도 아버지는 습관처럼 “덕희야, 춤 좀 추자. 아빠와 신나게 춤 좀 추자”고 말씀하셨다. 레코드판이 미끄러지며 내는 소리가 굉음이 되어 불만투성이였던 철없는 딸의 심경을 건드렸던 그 밤.

늙은 아버지에게 내뱉은 말은 “늙으면 곱게 늙지, 이 밤중에 웬 춤이야. 아유, 낼 시험이란 말이야. 전축 꺼, 듣기 싫단 말이야”였다. 표독하게 눈을 흘기며 앙칼지게 쏘아붙인 싸가지 없는 딸년이었다.

늦둥이 딸이 쏜 상처의 말은 술을 드셔야만 자유를 누리던 아버지 가슴을 쳤고, 전축 소리는 꺼졌다. 그리고 두 시간쯤 지났을까. 안방에 들어가셨던 어머니가 다급한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얘들아, 얘들아 이상해, 아버지가 이상해. 빨리 와봐.”

장지문을 열며 느껴지던 그 싸늘함. 그렇게 아버지는 가셨다. 아버지의 주검 앞에 후회의 통곡이 터졌다.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눈을 뜨시면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하고 싶어 교련 시간에 배운 인공호흡을 입이 으스러지도록 해댔다. 하지만 아무리 인공호흡을 해도 아버지의 육신은 점점 식어가기만 했다.

늦둥이 딸이 늙은 아버지에게 드렸던 17년 기쁨조의 기억. 하지만 마지막 몇 마디의 앙칼진 말로 나는 아버지에게 불효 여식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주검 앞에 혼절하며 뒹굴던 난, 아버지 없는 세월 동안 어머니에게 효도하리라 다짐했다.

어머니 살아생전, 아버지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것 같기도 하다. 나머지 빚은 사는 동안 ‘못 된 딸년’이 예쁘게 사는 것으로 갚아야 한다.

참으로 굴곡 많았던 내 인생, 힘겨웠던 고비도 수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망가질 수 없는 이유 중 한 가지, 그건 하늘에서 지켜보실 내 아버지다.


정덕희 행복연구소장

약력 : 1954년생. 동국대 교육대학원 교육경영 연구과정 수료. 연세대 교육문화 고위자과정 수료. 현대여성교육원 원장. 이미지 컨설팅 대표. 명지대 비서도우미과 주임교수. 행복충전소 행복지기(현). 관동대 사회교육원 객원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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