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명퇴 바람…인생 2모작 빨라진다] 대기업 과장에서 중소기업 CEO로

성공기 - (주)해림테크 김경민 대표이사

경기도 수원에 자리 잡은 ‘해림테크’는 잉크 카트리지 등 컴퓨터 관련 소모품 유통사다. 월매출 4억~5억 원의 건실한 기업을 이끌고 있는 이는 ‘58년 개띠’인 김경민(52) 대표. 지금은 중소기업 CEO이지만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파란만장’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1983년 대학을 졸업한 그가 선택한 첫 직장은 ‘롯데쇼핑’이었다. 한국 사회에 이제 막 ‘백화점’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던 1980년대 초. ‘판매사’ 자격증 1호 경력의 그가 유통의 꽃인 백화점에 발을 디딘 건 당연했다.

“보조 바이어로 시작해 15년간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가정용품부에서 아동스포츠부·식품부·감사실 등 회계 부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파트를 경험했죠. 나름대로 인정도 받았습니다. 제가 작성했던 품의서가 회사 전체의 롤 모델이 되기도 했죠.”

프랑스의 최고급 식료품 브랜드 ‘포숑(Fauchon)’의 베이커리를 유치한 건 바이어 이력의 절정이었다. 프랑스 현지로 직접 날아가 수많은 논의 끝에 결정된 입점은 한국 백화점의 격을 높인 사건이었다.

“1997년 초로 기억되네요, 딱 마흔 줄에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니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임원은 몰라도 사장이 될 자신은 없고 과장 직함이 회사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있는 것도 아니었죠. 이대로는 아니다 싶었어요. 가족은 물론 회사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사표를 냈습니다. 어렵게 수리됐죠.”

강남역 인근에 66㎡(20평)짜리 오피스텔을 얻었다. 일본 출장길에 우연히 접했던 게임 소프트웨어가 생각났다. 기판 1개를 수입하면 15만 원이 순수익으로 남았다.

월급의 몇 배를 단기간에 벌어들이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몇 개월뿐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와 고환율은 수입상에게는 치명타였다.

IMF로 수입 사업 치명타

“수입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제조업에 눈을 돌렸죠. 기술을 가지고 있는 친구와 1만9830㎡(6000평)의 공장을 얻어 ‘배전반’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전부터 빚을 잔뜩 진 상태였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두 번째로 했던 피아노 학원도 역시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죠. 내가 놀던 물이 아니었던 겁니다. 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이죠.”

실의에 젖어 무작정 쉬던 김 대표는 1999년 다시 일어서기로 마음먹었다. 아내가 꾸려왔던 화장품 가게를 정리하고 지인에게 도움을 얻어 8000만 원을 마련했다. 유통으로 잔뼈가 굵은 경험을 살려 잉크 카트리지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롯데백화점 후배의 도움으로 POP 광고와 관련해 백화점과 거래를 시작했다. 2000년 초반에는 ‘형님이라면 무조건 OK다’는 또 다른 후배의 도움으로 롯데마트와도 납품 계약을 맺었다. 정품 인증을 받은 제품 역시 총판을 하고 있는 대학 동창의 보증으로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가진 건 몸뿐이라, 저에게 조금이라도 호의를 보이는 사람들에겐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그때 맺은 인연들이 무엇보다 큰 재산이 됐던 거죠. 여기에 제가 제일 자신 있고 잘할 수 있는 일, 즉 유통으로 돌아간 게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기업이든 마찬가지이지만, 김 대표의 목표는 ‘롱런하는 기업’이다. 요즘에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q

약력 : 1958년생. 83년 건국대 농공학과 졸업. 83년 롯데쇼핑(주). 98년 해림공업주식회사. 99년 (주)해림테크 대표이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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