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근면한 분으로 기억된다. 특히 아버지는 우리 형제에게 노동의 의미와 부지런히 일하면 대가를 받는다는 것을 가르친 분이셨다. 당신이 그것들을 의도하셨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그중의 하나가 새벽 노동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등교 전 새벽에 일어났다. “풀을 베러 가야지. 그래야 밥값을 하는 것이지.” 아버지의 이런 음성이 처음에는 무척 싫었다.
하지만 밥값을 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아침 시간에 풀을 한 지게 산에 가서 해 와야 하는 날이 많았다. 소를 키우는 일은 나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던 것이다.
나는 잠이 아직 덜 깬 상태로 소를 몰고 지게와 낫을 챙겨 산에 올랐다. 아침 식사 시간까지 그리 많지 않은 시간이지만 새벽에 일어나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 덕분에 학교 수업 시간에 졸다가 선생님에게 매를 맞는 날이 많았다. 날씨가 좋은 날은 풀을 베러 어김없이 새벽 노동을 나가야 했다. 그것이 싫어서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을 간절히 기다리기도 했다.
새벽에 일어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면 당장 “야 이 자슥아, 해가 중천이야. 밥값을 해야지”라는 아버지의 호통이 날아왔다. 어린 나는 그 호통에 주눅이 들어 소를 몰고 사립문을 나서 들판으로 지게를 지고 풀을 베러 갔다. 이런 당시 아버지 강권(强勸)에 의한 새벽 노동의 습관은 지금 나를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1960년대여서 지금과 다르지만 당시 각 가정의 축재(蓄財) 수단은 소를 키우고 새끼를 쳐 집안의 소를 불리는 게 집안 목표 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 소 키우는 일을 돕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여물을 만들고 이를 소에게 주는 노동을 수시로 해야 했다. 아버지는 “쇠먹이를 많이 준비해야 한다. 풀이 너무 말랐다. 쇠먹이로는 좋지 않다”고 우리에게 큰소리로 말씀하곤 하셨다.
나의 새벽 노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태어나 자란 곳은 남해안의 섬. 이곳에서 아버지의 직업은 바람으로 가는 작은 풍선(風船: 섬과 육지와의 연락선)을 경영하던 선주 겸 상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남 좋은 일엔 앞장섰지만 돈 버는 재주는 많지 못한 상인이었다. 번 돈을 베 전대에 차고 새벽이면 돈을 혼자 세던 모습이 떠오른다. 하여튼 아버지는 당신 돈으로 섬의 일곱 마을을 도보로 돌면서 마늘·미역·톳·문어·김 등의 농수산물을 사서 육지에 가서 도매로 팔았다.
아버지가 각 마을에 미리 흥정해 사 놓은 물건을 우리 형제들이 새벽에 일어나 선창으로 날랐다. 마늘·톳·김·문어 등을 지게에 지고 배 시간에 맞추려고 땀을 억수로 흘리며 반은 달리듯 지게를 지고 동네 길을 내달리던 기억이 난다. 가까운 동네에서 해산물을 지게에 지고 선창에 도착하면 50원을 받았다. 두 번 하면 100원이 나에게 수입으로 돌아왔다. 먼 동네에서 지고 온 짐은 200원도 받았다.
당시로는 적지 않은 새벽 노동의 대가였다. 나는 이 노동의 대가를 아버지로부터 그 자리에서 바로 현금으로 받았다. 그 당시는 일이 힘들었지만 노동으로 현금을 만지는 일이 이런 새벽 노동을 못하는 동네 친구들과 비교해 어린 마음에 은근히 우쭐해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당시의 이런 새벽 노동은 노동이 내재한 고통을 배우게 하고, 일터에서 열심히 근면하게 일하는 습관을 키워 주려고 아버지가 나에게 준 선물 같이 느껴진다.
직장에서 힘든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해 노동하는 것, 세상에서 근면하게 일하는 습관을 잘 함양하는 것이야말로 인생길에서 중요한 영역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체감한다.
세계의 직장과 직업 노동에 대해 26년간 연구해 오는 동안 종종 아버지를 회상했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새벽 노동들이 당시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지금 내게 주는 시사점과 영감의 깊이는 남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김준성 연세대 직업 평론가
약력 : 1980년대부터 연세대 직업상담실장을 맡아 ‘커리어 디자인’에 대해 강연 활동을 했다. 전국대학취업지도협의회 부회장, 한국미래직업연구소 소장 역임.
그중의 하나가 새벽 노동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등교 전 새벽에 일어났다. “풀을 베러 가야지. 그래야 밥값을 하는 것이지.” 아버지의 이런 음성이 처음에는 무척 싫었다.
하지만 밥값을 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아침 시간에 풀을 한 지게 산에 가서 해 와야 하는 날이 많았다. 소를 키우는 일은 나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던 것이다.
나는 잠이 아직 덜 깬 상태로 소를 몰고 지게와 낫을 챙겨 산에 올랐다. 아침 식사 시간까지 그리 많지 않은 시간이지만 새벽에 일어나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 덕분에 학교 수업 시간에 졸다가 선생님에게 매를 맞는 날이 많았다. 날씨가 좋은 날은 풀을 베러 어김없이 새벽 노동을 나가야 했다. 그것이 싫어서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을 간절히 기다리기도 했다.
새벽에 일어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면 당장 “야 이 자슥아, 해가 중천이야. 밥값을 해야지”라는 아버지의 호통이 날아왔다. 어린 나는 그 호통에 주눅이 들어 소를 몰고 사립문을 나서 들판으로 지게를 지고 풀을 베러 갔다. 이런 당시 아버지 강권(强勸)에 의한 새벽 노동의 습관은 지금 나를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1960년대여서 지금과 다르지만 당시 각 가정의 축재(蓄財) 수단은 소를 키우고 새끼를 쳐 집안의 소를 불리는 게 집안 목표 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 소 키우는 일을 돕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여물을 만들고 이를 소에게 주는 노동을 수시로 해야 했다. 아버지는 “쇠먹이를 많이 준비해야 한다. 풀이 너무 말랐다. 쇠먹이로는 좋지 않다”고 우리에게 큰소리로 말씀하곤 하셨다.
나의 새벽 노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태어나 자란 곳은 남해안의 섬. 이곳에서 아버지의 직업은 바람으로 가는 작은 풍선(風船: 섬과 육지와의 연락선)을 경영하던 선주 겸 상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남 좋은 일엔 앞장섰지만 돈 버는 재주는 많지 못한 상인이었다. 번 돈을 베 전대에 차고 새벽이면 돈을 혼자 세던 모습이 떠오른다. 하여튼 아버지는 당신 돈으로 섬의 일곱 마을을 도보로 돌면서 마늘·미역·톳·문어·김 등의 농수산물을 사서 육지에 가서 도매로 팔았다.
아버지가 각 마을에 미리 흥정해 사 놓은 물건을 우리 형제들이 새벽에 일어나 선창으로 날랐다. 마늘·톳·김·문어 등을 지게에 지고 배 시간에 맞추려고 땀을 억수로 흘리며 반은 달리듯 지게를 지고 동네 길을 내달리던 기억이 난다. 가까운 동네에서 해산물을 지게에 지고 선창에 도착하면 50원을 받았다. 두 번 하면 100원이 나에게 수입으로 돌아왔다. 먼 동네에서 지고 온 짐은 200원도 받았다.
당시로는 적지 않은 새벽 노동의 대가였다. 나는 이 노동의 대가를 아버지로부터 그 자리에서 바로 현금으로 받았다. 그 당시는 일이 힘들었지만 노동으로 현금을 만지는 일이 이런 새벽 노동을 못하는 동네 친구들과 비교해 어린 마음에 은근히 우쭐해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당시의 이런 새벽 노동은 노동이 내재한 고통을 배우게 하고, 일터에서 열심히 근면하게 일하는 습관을 키워 주려고 아버지가 나에게 준 선물 같이 느껴진다.
직장에서 힘든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해 노동하는 것, 세상에서 근면하게 일하는 습관을 잘 함양하는 것이야말로 인생길에서 중요한 영역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체감한다.
세계의 직장과 직업 노동에 대해 26년간 연구해 오는 동안 종종 아버지를 회상했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새벽 노동들이 당시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지금 내게 주는 시사점과 영감의 깊이는 남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김준성 연세대 직업 평론가
약력 : 1980년대부터 연세대 직업상담실장을 맡아 ‘커리어 디자인’에 대해 강연 활동을 했다. 전국대학취업지도협의회 부회장, 한국미래직업연구소 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