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가 ‘검은 루머’의 진화


한 그룹의 사람들이 오후 2시 여의도 인근 모 ‘룸살롱’에 모인다. 잠시 후 각자의 가방에서 꺼낸 서류들을 들고 브리핑을 시작한다.

대기업 직원, 금융업 종사자, 검·경 관계자, 언론사 기자, 전 국정원 관계자 등 모두 정보 분야에 정통한 이들이다. 모임에서 취합된 내용들은 문서로 작성되고 ‘찌라시’로 유통되기 시작한다. 여의도 증권가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정보지’와 ‘루머’들의 일반적인 유통 경로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미확인 루머들은 해당 기업에 치명적인 경영 활동 위축을 가져온다. 믿고 돈을 맡긴 투자자들도 피해를 보기는 마찬가지다. 때론 증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어 국가 경제 전반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기까지 하는 루머. 증권가 루머는 누가 왜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유통 경로부터 피해 사례, 건전한 정보 가리기까지 루머에 관한 모든 것을 짚어본다.

“1815년 6월 18일, 영국과 프랑스의 국운이 걸린 한판 승부가 벌어졌다.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과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간의 워털루 전투. 나라의 운명이 걸린 건곤일척은 곧 수많은 투자자들이 거액을 놓고 벌이는 도박판이기도 했다. 승자를 정확히 예상한 사람은 천문학적인 돈을 움켜쥘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었던 것.

로스차일드 가문의 셋째 아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19일 아침 빠른 걸음으로 주식거래소에 들어섰다.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선 그의 모습에 모든 투자자들이 집중했다. 이윽고 휘하의 거래 요원들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자 일제히 영국의 국채를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수십만 달러어치의 국채가 시장에 쏟아져 나왔고 가격은 곤두박질쳤다.

‘로스차일드가 알아냈다! 웰링턴이 패배했다’는 누군가의 외침에 거래소는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영국 국채는 액면가의 5%도 안 되는 휴지 조각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네이선의 거래 요원들이 영국 국채를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6월 21일 밤 11시 웰링턴 장군의 특사가 런던에 당도했다. 그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병력의 3분의 1을 잃고 대패했다는 소식을 전해다.

이에 앞선 6월 19일 새벽 네이선은 특별 쾌속선을 타고 달려온 자신의 정보원을 직접 부두에서 맞았다. 정보원이 건넨 종이봉투에는 ‘영국이 승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루 이상 빠른 정보를 통해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무려 20배나 되는 차익을 남겼다. 더욱 중요한 건 이를 통해 영국의 공채 발행을 좌지우지하는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화폐전쟁’의 일부다. 속임수를 써서 시장을 왜곡하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한 전형적인 사례.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남보다 앞선 정보를 소유한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지금도 전 세계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베일 속의 실세’로 불린다. 남들은 모르는 정보, 규제를 통해 감춰진 정보는 그만큼 수요자들의 구미를 당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보력에 의해 성패가 갈리는 사례는 수없이 많았다. 특히 투자금, 즉 돈이 걸린 금융 분야에서는 정보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커진다.

메신저 타고 실시간 전파

증권가에 도는 루머들은 일명 ‘찌라시’로 불리는 사설 정보지로 대표된다. 정·재계, 언론계 등의 인사들이 모여 나누는 정보들이 몇몇 모임을 거치며 문서 형태로 유출되는 것. 연예가의 잡다한 소식에서부터 정계와 재계의 뒷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은데, 유료 정보지의 경우 1년에 몇백만 원에 이르는 고가에도 거래가 끊이지 않는다.

‘찌라시’의 연원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경유착이 극심했던 1970년대 대기업의 간부들이 정계 관계자들과 접촉해 나눈 대화들을 정리한 것이 시초다. 이후 정부의 언론 탄압으로 언로가 막혀 있던 1980년대 들어 시장을 형성해 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증시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정보지를 생산해 내는 사설 업체들도 등장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여의도가 ‘찌라시’ 생산·유통의 중심지가 되기도 한 이유다. 루머가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정보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 새로운 투자 정보에 목말라 하는 개인 투자자 등이 존재하는 한 사실과 소문을 가리지 않고 루머는 확대재생산될 수밖에 없다는 게 증권가 관계자들의 말이다.

문제는 정보의 진실성에 있다. 이는 곧 정보의 가치와 직결된다. 정보가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려면 사실로 입증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머의 속성은 확인되지 않은 헛소문들이 무차별적으로 퍼진다는 데 있다. 특히 특정 기업이나 종목을 대상으로 하는 루머들은 경영 활동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안겨 문제가 되고 있다.

파생상품 거래를 통해 단기 차익을 노리는 이들, 특정 기업의 주가를 낮추거나 올리려는 작전 세력들이 만들어 내는 루머가 대표적이다. 이런 루머들은 시장에 악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특정 기업은 물론 ‘일본의 신용 등급 강등’ 같은 루머들은 주식시장 전체를 교란시키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런 루머들이 인터넷 커뮤니티나 메신저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 한정된 수요층에 머물렀던 ‘찌라시’ 시장이 이제는 ‘공짜’와 ‘스피드’라는 메리트까지 갖추게 된 셈이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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