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 사내 벤처, 제2의 르네상스
말단 부서에서 시작해 사내 벤처로 성장한 기업들의 활약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사내 벤처는 대부분 신규 사업 진출을 위해, 혹은 사내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기동성과 유연성을 살려 사업화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물론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사내 벤처도 많지만 몇몇 사내 벤처들은 모기업과 동반자 관계를 맺고 훌륭한 중견 기업으로 성장하거나 아예 모기업을 먹여 살리는 핵심 사업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NHN과 인터파크는 사내 벤처 출신 기업의 대표 격이다. NHN은 삼성SDS에서 사내 벤처로 출발한 기업이다. 1999년 자본금 5억 원으로 삼성SDS에서 분사한 뒤 네이버컴이라는 이름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네이버컴 창업 당시 이해진 창업자(현 CSO)의 직급은 ‘대리’였다.
2000년에는 삼성SDS 출신인 김범수 전 대표가 일으킨 한게임을 인수·합병한 후 2001년 지금의 NHN이라는 이름으로 사명을 바꿔 인터넷 서비스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현재 NHN은 국내 최대의 인터넷 기업으로 성장했다. NHN의 올 1분기 매출은 3788억 원, 영업이익은 1505억 원에 달한다. 신한금융투자에 따르면 올해 NHN의 매출액은 전년 대비 15.6% 증가한 1조4302억 원, 영업이익은 29.7% 늘어난 6899억 원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SDS 분사 NHN, 연매출 1조4000억
특히 NHN은 모기업 삼성SDS에도 엄청난 수익을 안겨줬다. 삼성SDS는 2002년 NHN의 상장 전 주식 48만1980주를 액면가보다 낮은 주당 310원에 취득했다. 하지만 NHN이 코스닥에 상장하자마자 2∼3개월 동안 당시 4만∼5만 원 사이에서 지분을 매각, 150배에 달하는 평가 차익을 거뒀다.
1996년 독립한 인터파크 역시 데이콤(현 LG유플러스)의 사내 벤처에서 출발한 기업이다. 인터파크의 창업자인 이기형 회장은 당시 입사 5년 차에 불과했다. 주목할 점은 인터파크의 사내 벤처인 G마켓이다.
1999년 인터파크 내 사내 벤처 ‘구스닥’으로 시작한 G마켓은 이듬해 불과 10억 원의 자본금으로 분사, 2006년 나스닥 상장에 이어 오픈마켓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던 옥션을 제치고 정상에 등극했다.
이후 인터파크는 지난해 4월 오픈마켓인 G마켓을 미국 이베이에 당시 환율로 4688억 원에 매각하며 엄청난 평가 차익을 거뒀다. 즉, 사내 벤처 출신 기업이 다시 사내 벤처를 키워내 이를 통해 재도약의 발판을 삼은 것이다. 특히 당시 사내 벤처 결성을 적극 후원했던 이 회장도 개인적으로 보유 중이던 G마켓 지분 5.2%를 매각해 약 800억 원을 거머쥐었다.
이 밖에도 기술력을 인정받는 중소·중견 기업 중 대기업 사내 벤처 출신들이 꽤 많다. KT 사내 벤처에서 출발한 포인트아이는 위치 정보 서비스(LBS)의 대표적 전문 기업이며 통합 전자 결제 서비스 기업인 사이버패스는 2000년 데이콤 사내 벤처에서 분사한 기업이다.
국내 최대 병·의원 의료 전자 차트(EMR) 솔루션 업체인 유비케어는 메디슨의 사내 벤처로 출발한 기업이다. 이 회사는 2004년 이수그룹에 편입된 후 급성장하며 SK케미칼에 다시 인수됐다.
기업의 소모성 용품 구매 대행을 맡고 있는 아이마켓코리아는 1999년 삼성전기 사내 벤처에서 시작한 업체다. 매년 연평균 27%의 높은 성장세를 기록하며 10년 만에 1조5000억 원대 매출을 올리는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실제로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는 사내 벤처 열풍의 시대였다. 삼성·LG·SK·포스코·현대차 등 굴지의 대기업들이 사내 벤처 제도를 운영하면서 성공한 기업들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동안 사내 벤처 출신 기업들의 암흑기였다.
정확히는 사내 벤처 출신 기업들이 힘을 쓰지 못했다기보다 정보기술(IT) 버블이 꺼지면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벤처기업 자체가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기 어려웠다는 게 사실이다.
또 사내 벤처로 분사한 몇몇 기업들은 모기업의 명예에 먹칠하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특히 한 통신 기업의 사내 벤처로 출발한 제대혈 관련 기업은 고객들의 돈을 ‘먹튀’하기도 했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2000년대 후반 들어 다시금 빛을 보는 사내 벤처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현재 성공한 사내 벤처 출신 기업은 우선 모기업과 상당 부분 사업 아이템이 연결된다.
이 때문에 분사 후에도 수년간 안정적인 매출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타 벤처기업과 비교할 때 경쟁 우위를 갖고 있다. 또한 대기업에서도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신영역을 개척하는 선봉대이자 향후 큰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씨앗이라는 점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사내 벤처는 적은 인원과 저비용으로 효율적인 회사 운영이 가능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즉각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좋은 제도”라며 “잘만 운영하면 미래의 먹을거리를 책임질 수 있는 핵심 계열사로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바로 사업화할 수 있어
현재 이 같은 시너지를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곳은 현대·기아차와 계열 사내 벤처들이다. 현대·기아차는 2000년부터 사내 벤처 제도를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많은 대기업들이 사내 벤처를 장려해 ‘스타 기업’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공식적인 사내 벤처 제도를 운영하는 곳은 드물다.
하지만 현대·기아차는 비록 엄청난 스타 기업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6개의 사내 벤처를 분사시키며 모기업과 사내 벤처 모두 풍성한 결실을 이어가는 꾸준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처음엔 게임 등 신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했다”며 “자동차라는 큰 틀에서 개발을 진행하는 것이 낫다고 일찌감치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초기 사내 벤처들은 주로 수입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호 벤처인 HK-E카의 차량용 블랙박스, 2호 벤처 PLK가 개발한 차로 이탈 경보 장치가 대표적이다. PLK의 제품은 신형 에쿠스에 장착됐다.
사내 벤처가 없었다면 현대차는 지멘스에서 부품을 수입하느라 애를 태워야 했을 게 뻔하다. 3호 HK-MnS는 운행 중인 트럭 및 버스용 디젤 배기가스 저감 장치(DPF)를 시장에 출시했으며 4호 HK-U카는 중고차 온·오프라인 소매 사업에서 활약하고 있다. 또한 5호 HK-ENS는 차량용 진동 소음 진단기를 개발해 현대·기아차 직영 정비 사업소에 공급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독립한 6호 벤처 현대씨즈올의 경우 현대·기아차의 사업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현대씨즈올은 현대·기아차 직원 4명이 창업 멤버로 2007년 5월부터 중소형 선박 엔진 개발에 주력해 온 기업이다.
2년여의 개발 과정을 거쳐 현대씨즈올이 내놓은 엔진의 모태는 바로 S엔진(베라크루즈·모하비에 탑재되는 3.0리터급 디젤엔진)과 D엔진(싼타페 등에 탑재됐던 2.2리터급 디젤엔진)이다. 품질과 성능을 인정받은 현대·기아차의 엔진을 개량해 소형 선박 등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히 현대·기아차로부터 디젤엔진을 공급받아 선박용으로 개조하는 사업구조상 모기업의 수익 증대에도 영향을 줘 윈-윈 효과를 낼 수 있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사내 벤처 제도에 매년 20여 개 팀이 공모하고 있다”며 “지금도 7개 팀이 또 다른 벤처 창업을 위해 연구를 진행할 정도로 활발하다”고 설명했다.
현대씨즈올은 이미 해외 보트쇼 참가를 통해 유럽 및 오세아니아 24개국을 아우르는 12개 딜러 망을 확보했으며 2013년 이후 매년 3000대 정도의 선박용 엔진을 수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애경산업 중앙연구소 출신 인력들이 모태가 돼 탄생한 네오팜은 아예 그룹의 주력 계열사로 거듭날 태세다. 아토피 치료 전문 의약품 출시, 항암 물질 특허 획득 등을 통해 올해 1분기 매출 50억 원을 거두며 종합 제약 회사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안용찬 애경그룹 생활용품부문 부회장은 작년 8월 초 네오팜의 지분을 14% 이상까지 끌어올리며 그룹의 주력 계열사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이기도 했다.
특히 네오팜 매출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아토팜은 이미 지난 2001년 말 중국을 시작으로 현재 미국·홍콩·일본·러시아·우크라이나·싱가포르 등 11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특히 지난 2007년 러시아 수출을 계기로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등 한국 제품의 수출이 쉽지 않은 지역까지도 진출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품질로 승부해야 하는 미국 시장에서는 한국보다 50% 이상 비싸게 팔릴 정도다.
애경의 네오팜, 그룹 핵심 계열사로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견 기업들도 사내 벤처 제도를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벤처 1세대인 안철수연구소 역시 사내 벤처인 ‘고슴도치플러스’를 통해 새 사업 영역에 진출하고 있는 중이다.
고슴도치플러스는 우리나라의 숨바꼭질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2009년 첫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게임을 미국 페이스북에서 서비스하면서 현재 전 세계 30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모으고 있다.
또 2009년 12월에는 네이트앱스토어 오픈과 동시에 캐치미이프유캔 한글 버전과 해피가든, 한자챌린지, 영어챌린지, 세계어디까지가봤니. 바이러스퇴치작전, 야옹야옹 등 총 7종의 게임을 서비스하며 ‘SNS 게임’이라는 새 장르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하고 있다.
특히 올해 1월에는 일본의 대표적 SNS인 믹시에 게임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일본의 구미, 중국의 ‘51닷컴’에도 게임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하나투어도 사내 벤처 1호인 ‘하나투어샵’이 올해 매출 73억 원 수준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나투어샵은 여행과 레저 관련 용품 1만여 개가 등록된 온라인 쇼핑몰로 여행 전문 기업인 모회사와 큰 시너지를 내고 있다. 하나투어는 하나투어샵의 성공을 바탕으로 사내 벤처 제도를 보다 활성화할 방침이다.
이에 따라 지난 4월 ‘에이치엔티 마케팅’이라는 2호 사내 벤처를 출범해 온라인 관광 마케팅 사업에도 진출했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하나투어 사내 벤처는 본사의 경영 스킬과 자금 등을 지원받아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단순히 신규 사업 개발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기존 조직의 관료제적 한계와 비효율성을 극복하고 전체 조직의 혁신을 수반하는 기업의 생존 전략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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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송교석 안철수연구소 팀장
“가능성 보인다면 ‘기다림의 미학’ 필요하다”
송교석 안철수연구소 팀장은 사내 벤처인 ‘고슴도치플러스’의 탄생을 이끈 주역이다. 고슴도치플러스는 ‘캐치미이프유캔’이라는 게임을 작년 미국 페이스북에서 선보이며 SNS 게임이라는 새 장르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어떻게 사내 벤처를 시작하게 됐나.
2001년부터 안철수연구소에서 일하다 휴직 후 미국에서 컴퓨터사이언스를 공부하러 다녀 왔다. 미국 유학 중 당시 막 개념이 생겨나던 웹 2.0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후 안철수연구소에 다시 돌아와 처음에는 웹2.0의 개념을 접목한 소셜 미디어에 대한 실험을 시작했다.
때마침 이와 관련해 회사에서도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고 있어서 각각의 목표가 일치했다. 현재 사업을 확장 발전시켜 SNS 게임을 서비스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경영 실적은 어떤가.
현재 사내 벤처 팀원이 10명 정도 되는데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수준에 와 있다.
안철수 이사회 의장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던데.
안철수연구소의 창업자로서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1주일에 한두 시간씩 꼭 미팅을 가진다. 서울에 올라올 때는 직접 만나고 지방에 있더라도 영상회의를 진행한다. 특히 전략이나 마케팅 쪽에서 안철수 의장의 코멘트가 큰 도움이 된다. 오랜 기간 사업을 이끌어 온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사내 벤처를 이끌며 힘든 점이 있다면.
사실 사내 벤처가 자리를 잡기까지는 회사에서는 비용일 뿐이다. 우리도 작년 11월부터 매출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이때보다 5배 정도 성장했다. 2006년 말부터 3년여를 별다른 수익을 내지 못했던 것이다.
즉, 어느 정도 성과를 내기까지 이를 이해시키는 게 힘들었다. 특히 안철수연구소는 보안 회사이기 때문에 SNS 서비스와의 연관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시선들을 설득하는 작업도 어려웠다.
사내 벤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어떤 게 필요한가.
사내 벤처는 벤처기업이라는 특성에서 보듯 ‘속도’가 생명이다. 이 때문에 기존 기업의 보고 체계나 의사결정 프로세스와 달리 이뤄져야 한다. 물론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지면 달라져야겠지만 현재는 이 같은 원칙이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다.
또 하나는 대부분의 기업이 사내 벤처에 시간을 너무 적게 준다. 보통 비즈니스가 자리 잡으려면 3년 정도 걸린다고 보는데 대부분 1년 안에 성과를 내길 원한다. 사내 벤처를 키우고 싶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이홍표 기자 hawl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