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막히는 음모론…기축통화의 운명은

서점가 강타한 ‘화폐전쟁’ 뜯어보기

3d world currencies over a white background

쑹훙빙의 ‘화폐전쟁’이 또 한 번 화제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2권은 1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팔려나가며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17개 금융 가문이 300년간 세계경제를 지배해 왔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2024년 세계 단일 통화의 출범도 예언한다. 1권을 뛰어넘는 대담한 음모론이다. 수시로 ‘팩트’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든다. 언뜻 보면 황당하기까지만 한 ‘화폐전쟁’의 내용에 중국과 한국의 독자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 경제·경영서 베스트셀러 목록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쑹훙빙 중국 글로벌재경연구원장이 쓴 ‘화폐전쟁’이다. 지난 5월 초 나온 ‘화폐전쟁2-금권천하’와 2008년 출간된 1권이 주요 서점 판매 순위 상위권에 나란히 올라 있다.

교보문고 경제·경영 분야에서 2권은 1위, 1권은 5위에 각각 이름을 올리고 있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서는 2권이 3위, 1권이 8위다. 2권 출간과 함께 나온 지 수년 된 1권이 판매 순위 상위권에 재진입한 점도 이채롭다.

판매 속도로 보면 2권이 1권을 앞지른다. 2008년 7월 말 ‘화폐전쟁’ 1권이 처음 나왔을 때 초기 반응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그해 9월 세계적인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많은 사람이 금융 위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판매량이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작년 여름 삼성경제연구소가 뽑은 ‘최고경영자(CEO)가 휴가 때 읽을 책 20선’에 선정된 것이 ‘화폐전쟁’ 붐의 결정적인 기폭제가 됐다. 현재까지 ‘화폐전쟁’ 1권은 모두 20만2600여 부가 팔려나갔다.

백지선 랜덤하우스코리아 편집장은 “500쪽이 넘는 두툼한 경제 서적이 20만 부 넘게 팔린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며 “도서관 이용자 등을 포함하면 대략 50만 명가량이 이 책을 읽은 셈”이라고 말했다.

금융 위기 예견하며 명성 얻어

최근 나온 ‘화폐전쟁2-금권천하’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이보다 훨씬 뜨겁다.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채 한 달도 안 된 짧은 기간에 3만 부 이상 팔려 나갔다.

출판사 측은 2권의 경우 세계사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포함돼 경제·경영서뿐만 아니라 인문서 독자층까지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화폐전쟁’의 인기는 때마침 터진 글로벌 금융 위기를 빼놓고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쑹 원장은 해박한 역사 지식과 음모론에 기대 혼란스러운 금융 위기의 전모를 명쾌하게 정리해 냈다.

1권에서는 로스차일드 가문, 2권에서는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17개 금융 가문이 주기적으로 세계경제를 뒤흔드는 주범으로 지목된다.

링컨 미국 대통령의 암살에서부터 1, 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의 등장, 대공황, 심지어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까지 19세기 이후 터진 중요한 세계사적 ‘위기’는 대부분 이들 국제적인 금융 엘리트들이 막대한 부를 손에 넣기 위해 치밀한 각본에 따라 조장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국제금융 세력의 전략은 ‘양털 깎기’로 비유된다. 양의 털이 자라는 대로 뒀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털을 깎아 가져가는 것처럼 단번에 수익을 챙긴다는 뜻이다. 국제금융 세력은 통화팽창과 긴축을 되풀이하는 과정을 통해 양털을 깎아내듯 떼돈을 벌어들인다. 첫 단계는 유동성을 늘리고 신용 대출을 확대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산 투자를 늘리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갑작스럽게 돈줄을 죄어 자산 가격의 폭락을 유도한다. 이제 남은 것은 가격이 폭락한 자산을 헐값에 사들여 엄청난 차익을 챙기는 수순뿐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촉발된 미국의 금융 위기도 이들의 양털 깎기 과정의 연장선으로 설명된다. 자신들의 주머니를 또다시 국민 세금으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백 편집장은 ‘화폐전쟁’이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2008년 금융 위기가 터지면서 많은 사람이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어요. 세계화를 주장하는 금융 엘리트들의 주장대로 하면 모두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 하루아침에 깨졌기 때문이지요. 잘못하면 이들에게 이용만 당할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기면서 ‘스스로 경제 공부를 하자’는 움직임이 퍼졌고 이 책이 그런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졌어요. 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이나 미네르바 논란도 같은 맥락이죠.”

‘화폐전쟁’의 설득력은 상당 부분 저자인 쑹 원장의 독특한 이력에서 나온다. 1권과 2권 모두 전체 분량의 3분의 2 이상을 역사적 사건의 숨은 진실을 캐는 데 할애하고 있지만 음모론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게다가 화폐전쟁을 관통하는 충격적인 음모론의 대강 줄거리는 미국 극우파의 음모론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방대한 자료를 뒤져 집대성한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내용 자체는 그리 새로울 게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 부동산 시장의 버블이 정점으로 치닫던 2006년 쑹 원장은 문제의 진원지인 모기지 회사 패니메이에서 근무했다. 어느 날 회사 휴게실의 무료 커피 자판기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그는 다른 동(棟)에서도 똑같은 조치가 취해진 사실을 알게 됐다.

그날 저녁 자신의 블로그에 “패니메이가 타이나틱호처럼 침몰 위기에 놓여 있다”는 글을 썼고 2007년 2월 그의 ‘예언’이 사실로 드러나자 친구들은 블로그 내용을 책으로 출판하라고 권유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이 바로 ‘화폐전쟁’이다.

미 FRB는 금융가들의 사설 은행

쓰촨 출신인 쑹 원장은 랴오닝성 선양의 둥베이대에서 자동제어학을 공부한 뒤 1994년 미 워싱턴으로 건너가 아메리칸대에서 정보관리학과 교육학을 공부했다. 이때부터 수조 달러를 휴지 조각으로 만든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같은 큰 사건이 결코 몇몇 헤지 펀드에 의해 일어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틈틈이 세계금융사에 탐닉했다.

석사학위를 딴 뒤 2002년부터 5년간 프레디맥과 패니메이에서 파생금융과 경기 예측 모델을 연구하는 시니어 컨설턴트로 일했다.

미국 금융의 심장부에서 위기의 전모를 직접 목격한 쑹 원장의 주장은 불안감에 떨던 중국인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2007년 7월 중국에서 처음 출간된 ‘화폐전쟁’은 수백만 부가 팔려나갔다.

책의 대성공과 함께 그의 인생도 달라졌다. 지난해 미국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40명’에 후진타오 주석, 원자바오 총리와 함께 그의 이름을 올렸다.

그는 2007년 귀국해 이듬해 한 해 동안 강연료로만 1000만 위안(약 20억 원)을 벌어들이며 스타로 등극했다. 지금은 자신이 인수한 경제 잡지 ‘글로벌재경’의 부설 연구소인 글로벌재경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굵직한 세계사적 사건들을 로스차일드로 대표되는 국제금융 엘리트들의 소행으로 연결 짓는 음모론에 수많은 의문이 제기된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모두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 설명력과 미래에 대한 예측력이다.

앞서 언급한 국제 금융자본의 ‘양털 깎기’ 전략이 가능한 것은 이들이 세계의 기축통화인 달러의 통제권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 수단은 바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FRB)이다.

국제 금융자본은 링컨 대통령 암살 등 집요한 노력 끝에 마침내 1931년 FRB 창설에 성공했다. 놀라운 것은 오늘날 세계의 중앙은행 격인 FRB가 모두의 예상과 달리 정부 기관이 아니라 민간은행들이 지분을 소유한 사실상의 사설 은행이라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12개 지역 FRB 중 가장 규모가 큰 뉴욕 FRB는 이 지역의 민간 은행들이 지분을 나눠 갖고 있다. 쑹 원장은 이런 구조를 통해 국제 금융자본이 전 세계에 달러를 뿌려 거품을 조장한 다음 이를 터뜨려 헐값에 주머니를 채우는 ‘양털 깎기’ 전략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실행할 수 있게 됐다고 본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의 금태환(금본위제) 포기 선언으로 이들의 발목을 잡던 마지막 족쇄마저 사라졌다.

쑹 원장은 최근의 글로벌 금융 위기도 금융자본과 엘리트의 치밀한 기획에 의해 촉발됐다고 주장한다. 미국 통화정책의 수장이던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은 금융 위기의 징후를 명확히 파악하고도 이를 방조했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국제금융 자본의 하수인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은 달러화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달러의 몰락은 오히려 이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 않을까. 답변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국제금융 엘리트들의 음모가 숨어 있다.

중국에 부는 ‘금융 애국주의’ 바람

달러화가 몰락할 경우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그동안 땀 흘려 외화를 벌어들여 온 중국 같은 수출 중심의 국가들이다. 이들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미국 국채를 손에 들고 있다.

이것이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파산 면책을 선언하고 산뜻하게 새 출발할 수 있게 된다.
국제 금융자본은 궁극적으로 세계 단일 화폐를 꿈꾼다. 대규모 금융 위기를 조장해 부를 수탈한 다음 각국이 서로 다른 화폐를 사용하는 데서 오는 혼란을 명분으로 단일 화폐를 띄운다는 것이다.

달러를 대체할 새로운 기축통화를 뒷받침하는 것은 미국이 비축해 둔 금 8100톤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금 3400톤이다.

쑹 원장은 세계 단일 화폐의 등장 시점을 2024년으로 아예 못 박아 놓았다. 이러한 음모에 맞서 쑹 원장이 내놓는 대안은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중국의 각성과 금본위제로위 복귀, 위안화의 기축통화화 등으로 요약된다.

쑹 원장의 분석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회의적이다. 먼저 FRB가 국제 금융자본의 도구라는 주장에 대한 논란이 제기된다. 샌프란시스코 FRB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최공필 한국금융연구원 상임자문위원은 “FRB가 민간은행들의 소유인 것은 분명하다”며 “하지만 국제 금융자본이 정말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FRB를 조정하는지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도 “FRB가 모든 공공성을 배제하고 금융가들의 뜻대로만 움직인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말했다. 곽수종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의 견해는 훨씬 비판적이다.

곽 연구원은 “세계 어떤 중앙은행도 FRB만큼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곳은 없다”고 단언한다. 민간은행들이 지역 FRB의 지분을 소유함으로써 오히려 정치적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판단이 가능하고 시장의 메시지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금본위제로의 복귀와 새로운 기축통화로서 위안화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센터장은 “40년 전 금태환을 포기한 것은 금본위제가 당시 경제구조나 세계경제 시스템과 맞기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최 자문위원도 “금본위제로는 지금처럼 커진 세계경제를 지탱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현행 국제금융 체제의 문제점은 분명하지만 금본위제가 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이다. 최 자문위원은 “비대해진 글로벌 금융의 ‘판’을 줄이는 게 필요하지만 누구도 이를 원하지 않는다”며 “향후 조정 과정에서 미국의 이익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위안화 역시 달러화의 대안이 되기는 아직 이르다. 곽 연구원은 “중·장기적으로 달러의 위상 하락은 불가피하지만 위안화가 달러를 대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며 “아무리 빨라도 50년 내에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단순하게 흑자를 많이 낸다고 기축통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중국 경제가 미국 경제만큼 신뢰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일축했다. 중국은 엄청난 잠재적 부실을 안고 있으며 각종 통계의 신뢰성 역시 의심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음모론의 사실 여부보다 왜 중국에서 ‘화폐전쟁’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만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국팀장은 “중국 내에서 달라진 경제 규모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며 “‘화폐전쟁’은 미국의 파워는 단순히 경제적 규모가 아니라 기축통화 발행국이라는 독특한 지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줬다”고 말했다.

쑹 원장인 자신의 책 제목을 ‘화폐전쟁’으로 정하고, 이제는 중국이 화폐 통제권을 둘러싼 한판 승부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병서 경희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는 최근 2년 새 중국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금융 애국주의’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 교수는 “중국 내 우파들은 세계 2위 경제 대국인 중국이 제대로 발언권을 갖지 못하는 것은 시장구조가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강하다”며 “‘화폐전쟁’은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선진 금융자본의 습성과 전략, 문제점을 파헤침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금융시장 개방을 앞둔 중국인들의 불안감도 반영돼 있다.

이와 함께 전 교수는 “한국에 쑹 원장 같은 금융 전문가가 왜 없었는가도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미국 월스트리트에 진출해 억대 연봉을 받는 한국인들이 많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때 이를 사전에 경고해 경종을 울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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