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 사셨던 ‘영원한 청년’

하얀 아카시아 꽃잎이 흐드러지던 날, 길게 나 있는 오솔길 자락에서 하얀 한복을 입으신 아버지는 “운호야, 이제 나는 간다. 잘 살아라”라며 손을 흔드셨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1주일 만에 꿈에 나타났던 이후로 아버지는 34년간 한 번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다. 그때 꿈에서 뵈었던 모습 그대로 아버지는 언제나 내겐 서른여섯 살 청년으로 남아 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3남 1녀의 장남으로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지켜야 했던 어린 시절은 스스로를 담금질하게 만들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나이를 세면서, 해마다 10년 계획을 고쳐 쓰면서 아버지 역할을 자청했던 내 리더십은 돌이켜보면 아버지로부터 일찍이 물려받은 자산이 된 셈이다.

아버지는 땅 끝 마을 해남 울돌목에서 태어나셨다. 나고 자란 시골이 성에 차지 않으셨는지 대처인 광주로 나가 네 살 연상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셨다. 이후 네 살배기인 나를 안고 목포 항구에서 부산행 여객선을 타셨다.

이십 년 전 부산에서 안정적인 은행원 생활을 접은 나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의 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달랑 가방 하나 들고 한강철교를 지나면서 ‘그래, 여기가 서울이야? 알았어!’라고 혼자 되뇌던 나는 아버지를 닮아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학교 방학이 되면 아버지는 나를 매년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로 보내셨다. 할머니가 장손자를 보고 싶어 하실 것이라는 생각에 고사리 같은 나의 손에 시골행 열차표를 쥐어주신 것이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혼자서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독립심까지 기를 수 있었다.

지금 내게 그림을 그리고 글쓰기를 즐기는 서정적인 면이 있다면, 그 시절 청정 지역인 시골에서 해마다 방학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식들이 거짓말하지 말고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했던 아버지가 남겨 주신 가훈은 ‘정직’이다. 또 맡은 일에 대해서는 끝장을 볼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고, 또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내가 여섯 살 때 집에 도둑이 들어 당시 우리 집에서 제일 비싼 물건이었던 라디오를 도둑맞았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부산역에서 부산진역까지 도둑을 추격해 격투 끝에 두 시간 만에 손에 라디오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셨다.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올 때면 내 앞에서는 칭찬을 아끼고 돌아서서 어머니에게 “운호가 참 잘한다, 그치?”라며 기뻐하셨다는 아버지. 내 기억에 항상 엄하고 강한 분이었지만 정이 많고 흥이 많으셨던 아버지의 가족과 이웃 사랑은 남달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의 손에는 언제나 잘 익은 감이나 과일 바구니가 쥐어져 있었다. 행여 쉬는 날에는 우리 형제들의 손을 잡고 나들이 하시기를 좋아하셨다. 고향에 들를 때면 항상 동네 분들을 모셔서 동네잔치를 벌이고, 제사가 있을 때는 넉넉히 음식을 장만하게 하시어 동네 분들과 나누기를 좋아하셨다.

연고도 딱히 없던 낯선 땅에 무작정 이주해 6년 만에 집을 마련할 때와 시골에 남겨진 동생 결혼식 날 크게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카시아 꽃향기보다 향기로운 추억으로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사별한 지 34년 동안 홀로 사형제를 키우며 칠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는 아직도 네 살 연하였던 남편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눈물을 훔치는 옷깃 끝에서 곧고 강했지만 자상했던 아버지의 흔적이 느껴진다.

이제 나는 스무 살 된 딸아이와 열네 살이 된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지금의 나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중학교 시절과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함께 숨 쉬며 나누었던 십사년 간의 짧은 기억이 내 마음속에 영원한 존재로 남아있듯이, 당신의 손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 모습일 것이다.






조운호 (주)얼쑤 사장

1962년 전남 해남 출생. 연세대 경영대학원 졸업. 1999년 웅진식품 사장. 2006년 세라젬 부회장. 2009년 (주)얼쑤 사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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