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유로존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향후 가상 시나리오

지난 5월 9일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긴급 재무장관 회의를 열고 난상 토론 끝에 7500억 유로(IMF 2500억 유로 포함)의 긴급 자금 지원에 합의했다. 이에 앞서 그리스에 지원하기로 한 1100억 유로까지 합하면 이번 남유럽 금융 위기로 투입되는 자금 지원 규모는 총 8600억 유로에 해당한다.

2012년까지 PIIGS(포르투갈·아일랜드·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 국가들이 갚아야 할 국채 원금과 이자 규모가 대략 6800억 유로인 점을 감안하면 지원 금액 자체는 충분히 마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소위 급한 불은 끈 셈이다.

글로벌 증시도 지원 합의 소식에 화답하며 일정 부분 안도 랠리를 펼쳤다. ‘EU 지원 합의’라는 호재 자체는 단기 증시에 모두 반영됐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증시 흐름은 지원 합의 이후 남유럽 사태가 어떤 경로로 진행되는지 여부에 따라 좌우될 공산이 크다.

여기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남유럽 사태가 진정되고 글로벌 경기가 금융 위기 이후 보였던 속도 이상으로 빠르게 회복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유로 지역의 수출이 활기를 띠고 기업들이 벌어들인 이익으로 역내 소비가 살아나야 한다.

멈췄던 경기순환의 톱니바퀴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면 위기를 초래했던 남유럽 국가의 핵심 부가가치 산업인 관광과 해운, 금융 산업도 회생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들 국가도 서서히 자생력을 키워나갈 수 있다. 안타깝게도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이것뿐이다.

그런데 최상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최상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기 이전에 우려되는 시나리오가 훨씬 더 많이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식시장도 이에 대한 불확실성을 쉽사리 외면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된다.


EU 연합안 실행 그리 쉽지 않아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크게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EU 회원국 합의안의 구체적인 실행이 지연될 가능성이다. 먼저 EU가 단일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구체적인 지원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국가별로 지원 규모가 할당돼야 하고 각국의 의회를 통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이 따를 수 있다. EU 지도자들이 애써 노력하고 있지만 첨예하게 대립되는 국가 간의 정치적 갈등을 과연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든다.

이러한 갈등이 계속된다면 해외 자본들은 인내하지 못하고 EU 지역을 빠르게 빠져나올 것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위기의 국가들은 근본적으로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들 국가에서 해외 자본들마저 이탈하면 모라토리엄(채무 지불 유예 선언)과 같은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유럽 금융 위기 사태가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유럽 일부 국가에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발생할 가능성이다. 사실 남유럽 재정 위기에 대한 EU 회원국들의 합의안 중 금융시장을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국채 매입 결정이다.

유로의 설립 조약에 따르면 ECB의 회원국 국채 직매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전망됐던 대책이다. 그런데 ECB는 유통시장을 통한 채권 매입이라는 강수를 두면서 채권 매입을 결정했다.

그런데 여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우선 특정 국가만을 위해 채권을 선별적으로 매입해 줄 경우를 가정해 보자. 채권 매입은 유동성 공급을 의미하므로 채권 매입 해당 국가의 물가는 상승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채권 매입을 하지 않는 국가의 물가 상승률과 괴리가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면 독일과 그리스의 물가상승률의 괴리가 크게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럴 경우 유로 시스템이 위협받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단일 통화가 유지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단일 통화를 사용하는 지역의 물가상승률이 비슷하게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로’라는 단일 통화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채권을 매입하는 것인데 유로 시스템이 위협받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CB가 특정 위기 국가의 채권 매입을 강행하게 된다면 일부 해당 국가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 EU와 IMF의 지원을 받게 되는 국가는 엄청난 재정 긴축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풍요로웠던 복지 혜택은 줄어들고 임금과 연금은 삭감될 것이며 세금은 늘어날 것이다. 흔한 말로 정부와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 매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소비 여력의 축소를 의미한다.

유로의 단일 통화에 묶여 환율 하락에 따른 수출 증가라는 경제 시스템의 자율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내수 경기까지 침체된다면 경제성장률이 둔화될 것은 자명하다. 결국 위기 국가는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물가가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으로 진입하게 되는 더 큰 고통이 다가올 수 있다.

‘스태그플레이션’ 발생할 수도

셋째, 아시아 지역의 경기 회복 속도가 둔화되거나 자산 버블이 발생할 가능성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럽 주요 국가들이 재정 적자 축소에 나서면서 투자 및 민간 소비가 감소하면 이 지역의 수입 수요는 줄어들게 된다. 이럴 경우 아시아 국가의 수출 성장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글로벌 경제성장을 주도해야 할 중국의 고민이 깊어질 것이다. 중국의 국가별 수출 비중에서 EU 지역이 전체 수출의 21.8%를 차지하고 있다(2월 수출 금액 기준). 한국의 경우 EU 수출 비중이 전체의 10.3% 수준이지만 중국을 거쳐 EU 지역으로 수출되는 간접 경로를 감안해야 한다.

중국의 수출 비중이 27.3%에 달하기 때문에 중국의 EU 수출이 타격을 받을 경우 간접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금융 위기 이전 세계 경제성장의 동력이었던 ‘21세기 글로벌화’의 역풍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아시아 지역은 경기 회복 속도 둔화 외에도 자산 버블을 걱정해야 할지 모른다. EU 지역의 천문학적인 자금이 지원되는 과정에서 유동성이 다시 아시아 국가들로 흘러들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풀려난 유동성은 상대적인 통화 강세가 기대되는 지역의 자산 투자에 대한 매력을 포기하기 힘들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아시아 국가의 부동산과 주식과 같은 자산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돈의 심리는 쏠림 현상을 보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투자 매력의 추가 기울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유동성의 힘은 무섭고 강력하게 나타난다. 만약 우려대로 아시아 지역의 자산이 적정 가치를 넘어 버블 현상을 보이면 이후 우리는 또 다른 후유증에 시달릴 것을 걱정해야 한다.

넷째, 다른 선진국으로 재정 위기 우려가 점염될 가능성이다. 경계 대상 1순위는 영국이다. 영국 역시 재정 적자 상태는 심각하다. 올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12%의 재정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 정부 또한 강력한 재정 긴축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상황인데 5월 총선 결과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강력한 재정 긴축정책 노선을 갖고 있는 보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향후 연립정부 조합을 지켜봐야겠지만 신정부의 강력한 재정 건전성 추진 노력이 불확실해질 경우 국제 신용 평가사들의 신용 등급 하향 조정 압박과 이에 따른 해외 자본 이탈이 우려된다. 영국에 대한 해외 자본의 불신이 커질 경우 돌아오는 국채 원금 만기 상환과 1873억 파운드 규모의 국채 발행 계획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해외 자본이 전체 영국 국채의 35%를 소화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이 디폴트 위기까지 내몰릴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최고 신용 등급을 부여 받고 있는 영국이 거론되는 사실만으로도 금융시장은 또 한 번 충격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엄청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 주정부와 정부 부채가 GDP 규모의 2배를 넘어서고 있는 일본까지 금융 위기 우려가 거론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소설 같은 얘기들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시나리오들이 현실화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EU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공조가 다시 한 번 효율적으로 발휘돼야 한다.

만약 이 중 하나의 시나리오라도 현실화된다면 주식시장은 미국 발 금융 위기 이상으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장기간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경수 투자전략팀장
1974년생. 2001년 성균관대 회계학과 졸업. 2001년 삼성증권 입사. 2006년 대우증권. 2008년 토러스투자증권 애널리스트(현).

이경수 토러스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 ks_lee@taurus.co.kr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