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하고 치열했던 가장의 모습

고(故) 이주일 선생의 무명 시절 얘기다. 땀조차 흐르지 않을뿐더러, 그렇다고 마음 놓고 흘릴 수도 없는 막연하기만 한 단역 시절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TBC TV 마이크에 잔뜩 긴장한 채 실로 역사적인 한마디를 던지듯이 내뱉었다.

‘뭔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되었는지, 정말로 그는 뭔가를 제대로 보여주고 배꼽이 빠질 만큼 웃겨 주었다.

아버지도 그렇다. 늘 가족들에게 뭔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셨다. 1960년대, 아버지는 운전 기술 하나로 중견 무역회사 사장의 비서 일을 시작하셨다.

내가 기억하는 젊은 시절 아버지의 모습은, 멋지게 차려 입은 양복과 세련된 구두, 광택이 나는 검정색 차로 가득하다. 10년 동안 착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신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드디어 ‘대단한 것’을 보여주셨다. 바로 ‘내 집 마련’이었다. 아담하지만 정원도 딸려 있는 집이었다.

그리고 내가 열한 살 즈음에는 아버지를 찾는 아랫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아 보였다. 아버지는 처음에 사장의 기사로 시작해 마침내 사장의 최측근인 비서실장에까지 올라섰던 것이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영어와 무역 업무도 독학으로 공부했고 치열한 노력으로 비서실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사춘기가 올 즈음 ‘여태까지와는 다른 뭔가’를 또 보여주셨다. 사장의 고의 부도성 해외 도피를 한국에 끝까지 남아 도와주었고 그 후 경찰서에서 소위 말하는 ‘독박’을 쓰게 됐다. 아들에게는 멋진 ‘충(忠)’의 정신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실업자로서의 고난의 삶이 시작됐다. 그날 이후 가정에 월급봉투를 보여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뭔가 보여주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어머니의 눈치를 보는 일도 그랬고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려는 시도들도 그랬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는, 집안의 장기 침체 20년의 서막이었다.

중고차 매매상부터 시작한 아버지는 너무 솔직해서 이윤을 남기지 못했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수금을 하지 못해 접어야 했고, 동업으로 시작한 두 번째 사업은 동업자의 지나친 투기성 때문에 큰 은행 빚만 남기고 끝내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어머니는 보험설계사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시작하신 후 밤낮으로 일하셨지만 집에서 뭔가를 보여주는 일은 드물었다. 결국 아버지의 사업은 더 큰 손실만 남기고 끝났다.

더 이상 대출이 되지 않을 만큼 집안의 모든 자본을 끌어대고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지만 집에는 월급봉투 대신 수많은 독촉장과 최고장, 그리고 결국 신용 불량자라는 딱지만 남기게 됐다. 그 후 직장도 잡지 못하고 카드도 만들지 못하고 친한 지인의 대형 식당에서 건물 관리를 하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많은 뭔가를 보여주셨다. 당신이나 나나 그 뭔가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온 듯 보이지만, 그 뭔가는 분명히 있다. 그것은 가정을 지켜내려는 끈질긴 책임감이었다. 당신의 인생이 아닌 가족에게 뭔가를 보여주려는 그 절실함을 나는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스스로 독립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배우고 키울 수 있었다. 결국 내 나이 서른세 살 정도에 아버지는 건물 관리를 하시면서 받은 월급을 모아 은행 부채 일부를 갚으셨고, 내가 모은 일부를 더해 완전히 신불자의 족쇄를 푸셨다. 그리고 그날 아버지는 은행에 가셔서 계좌를 개설하고 신용카드도 만드셨다. 마침내 20년 가까운 장기 침체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뭔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손녀들에게는 자상한 할아버지, 며느리에게는 편안한 시아버지, 어머니에게는 인생의 동반자로서의 친구. 내가 지켜본 아버지의 40년은 코미디극만큼 유쾌하고 무명 시절을 살고 있는 희극배우만큼 치열했다. 그 사이 세 딸아이의 아버지가 된 나도 당신처럼 가족들에게 ‘뭔가’를 보여주며 살고 있다.



이우곤 이우곤HR연구소 대표

1971년 서울 출생. 건국대 독어독문학과 학사 및 석사. 건국대 학생인력개발처 겸임교수(현). 이우곤 HR연구소 대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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