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욕’과 ‘봉사’로 한국 패션 일으키다

‘제2의 전성기’ 원대연 한국패션협회장의 성공 스토리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네요.” 올해 예순넷의 원대연 한국패션협회 회장이 수첩을 보여준다. 두 달 치 점심, 저녁 약속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원 회장이 제일모직 패션부문 사장을 그만둔 때가 지난 2004년 1월. 2003년 제일모직 패션부문은 최고의 실적을 올렸지만 삼성그룹 수뇌부로부터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워낙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충격이 컸어요. 솔직히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다. 원 회장은 “당시(제일모직 사장 시절)보다 더 바쁘고 더 즐겁다”며 밝게 웃었다.

기업 마인드 도입해 협회 살리다

원 회장은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다 당시 삼성물산 봉제수출과로 이직, 최고경영자(CEO)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7년간 패션부문 사장을 지내면서 제일모직을 국내 최고의 패션 브랜드로 만든 주인공이다. 하지만 제일모직을 떠난 뒤 그의 활약상이 더 눈부시다.

만성 적자에 허덕이며 간판만 살아있다시피 했던 한국패션협회는 그가 회장을 맡으면서 흑자로 돌아선 것은 물론 중소 패션 업계의 헤드쿼터로 거듭났다. 중소 패션 업체들의 염원이었던 수도권 물류단지를 180억 원의 기금을 모아 경기도 이천에 건립하고 있는 것만 봐도 협회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행사였지만 패션 단체 간 분란으로 ‘반쪽짜리’라는 지적을 받았던 서울패션위크의 조직위원장을 맡아 주요 패션 단체들을 모두 참여시키면서 가장 권위 있는 글로벌 패션 행사로 바꿔놓았다. 이뿐만 아니다. 평범한 학원 수준의 삼성디자인학교(SADI)를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인 교육기관으로 키웠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CEO 자리를 꿈꾸지만 실제 그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극소수다. 더구나 정상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반면 머무르는 시간은 아주 짧다.

그 다음은 예외 없이 내리막길이다. 정상을 내려온 CEO들은 대부분 사회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들의 재능과 경험은 부하 직원들이 만들어준 기념 앨범 속에 고이 간직될 뿐이다.

하지만 원 회장은 남들과 달리 추억의 기념 앨범 속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제2의 전성기를 활짝 열어가고 있다. 제일모직 사장 시절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의 기업이 아닌 한국 패션 업계 전체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고, 별도의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패션협회장은 일종의 명예직이다.

2004년 초 서울패션협회 임원진이 그를 찾아와 SOS를 쳤다. 당시 협회는 직원 월급도 주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그는 고사했지만 협회 임원진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상근 부회장을 직접 뽑겠다는 조건을 걸고 회장직을 수락했다.

일반적으로 협회 부회장은 정부가 선임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는 제대로 일하기 위해선 ‘노후 보장용’으로 내려오는 관료가 아니라 기업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정부는 당연히 반발했다. 관련 부처는 “그 문제는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회장을 맡을 수 없다”며 배수진을 쳤지만 “그러면 물러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당연히 회장을 선출하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협회는 만장일치로 그를 회장으로 뽑았다. 그는 결국 자신의 뜻대로 상근 부회장을 기업인으로 선임하고 협회로 출근했다.

출근하자마자 협회의 분위기를 바꿔 나갔다. 당시 ‘회비를 받으면서 해 준 것이 뭐가 있느냐’는 불만이 회원사들에 팽배해 있었다. 협회 임직원들도 개선 의지가 없었다. “공무원이 부회장으로 내려오다 보니 협회 직원들도 자신의 신분을 준공무원처럼 생각하더군요.”

그는 회원사는 고객이고 고객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협회가 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급여를 10% 낮추고 연봉제도 도입했다. 모든 임직원에게 ‘1인 1목표제’를 갖도록 하고 연말에 이를 평가해 연봉에 반영했다.

이렇게 기업 마인드를 도입하자 협회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협회가 해보자는 의지를 보이자 회원사가 늘고, 회원사가 늘자 회비 수입도 많아졌다. 적자에서 벗어난 것은 물론 회원사를 위한 서비스가 다양해지고 품질도 올라갔다.

패션협회의 회원사들은 대개 영세하다. 이들의 고민은 바로 물류다. 서울 도심에서 1시간 거리에 물류센터를 갖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개별적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정부의 허가를 내기도 쉽지 않다. 오래전부터 협회에 ‘물류단지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적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회장 취임 후 물류센터 건립을 협회의 핵심 과제로 정했다. “협회가 회원사를 위해 도와준 것이 없다는 ‘협회 무용론’을 불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통해 협회의 결집력을 높일 수 있다는 판단도 했고요.”

하지만 자본금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회원사들을 대거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투자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물류센터 안에 쇼핑센터 같은 상업 시설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회원사들은 대환영이었다. 23개 업체로부터 180억 원의 투자금이 들어왔다.

서울패션위크를 글로벌 쇼로 만들다

문제는 또 있었다. 교통이 편리한 곳에 수십만 평의 땅을 확보하는 게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부지 선정은 전문 디벨로퍼에게 맡겼다. 입지의 타당성을 꼼꼼히 따졌고 1년 6개월의 협상을 통해 경기도 이천의 모 문중 땅을 사들였다.

지역 상인들과 시민 단체들의 반대도 거셌다. 이들에게는 일본의 복합 시설을 견학시키는 등 끈질긴 설득을 통해 지지를 얻어냈다. 정부 허가를 내는 데도 몇 년이 걸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협회가 ‘없어서는 안 될’ 협회로 거듭났다.

서울패션위크는 3월과 10월 연간 2회 열리는 대규모 패션 행사다. 서울시와 지식경제부가 비용을 대고 서울시가 주관해 왔다. 하지만 일부 디자이너 단체가 참석하지 않는 데다 일회성 이벤트에 머물렀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그는 조직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서울시의 제안을 받고 서울시의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뒤 수락했다. 담당 공무원이 자주 바뀌면서 그때마다 혼선이 초래됐기 때문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서울시장과 지속 발전을 보장하는 협약서를 쓰고 별도의 사단법인도 만들었다. 목표도 분명히 했다.

5~10년 뒤 세계적 디자이너를 배출하겠다는 등의 당찬 비전을 세웠다. 패션쇼에 참여하는 디자이너 선발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관록 대신 실력을 따졌고 글로벌 경쟁력 여부를 중시했다. 수출을 많이 하는 업체들에는 가산점을 줬다.

행사의 슬로건도 ‘비즈니스 프렌들리’로 정했다. ‘패션도 팔아야 살아남는다’는 생각에서다. 행사 일정도 바이어 중심으로 재편했다. “그동안의 행사를 살펴보니 1주일 동안 하루는 A협회, 다음날은 B협회 등의 순서로 하더군요. 그러다 보니 해외의 남성복 바이어가 오면 1주일간 머물러야 했습니다. 철저히 디자이너 중심이었죠. 이를 남성복 2일, 여성복 5일 등의 순서로 바꿨습니다.”

일부 디자이너들이 불참을 선언하는 등 저항이 심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특히 선발되지 못한 디자이너들의 항의가 극심했다. 평가위원회를 구성해 평가의 객관성을 높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했다.

그의 진심이 알려지고 바이어의 수주액도 늘어나자 그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지난 3월 열린 서울패션위크는 행사 전날 입장권이 매진될 정도로 대성황이었다. 바이어 수주액도 340만 달러로 작년(300만 달러)에 비해 13% 이상 증가했다. 그는 “앞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 버금가는 패션 강국으로 부상할 기반을 닦았다”고 말했다.

SADI, 학벌의 장벽을 무너뜨리다

원 회장은 2002년부터 2009년까지 7년간 SADI 학장을 지냈다. 굴지의 대기업 CEO 출신이 3년제 학교 학장을 맡은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평소 글로벌 디자이너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미국 파슨스에 버금가는 세계적 디자인 학교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수립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대학 학위가 강조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우수한 학생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교수들과 학생들도 ‘대학 인가를 받아 달라’며 시위에 나서는 등 학내 분규도 끊이지 않았다. 그는 먼저 경영 진단을 통해 비전이 없고 정체성이 없으며 소통이 안 된다는 3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고 개선에 나섰다.

‘2010년 한국 최고의 명문, 2025년 세계 디자인 명문 학교 진입’이라는 목표를 정했다. 학원이라는 정체성은 어쩔 수 없는 일로 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조직원들을 설득했다. 대신 규제가 완화되면 디자인 전문대학으로 바꾸기로 하고 그전까지는 ‘학원’이라는 명칭을 ‘학교’로 바꾸자고 제안해 분위기를 바꿨다.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위원회를 만들어 교수들을 참여시켰다.

학교 문화도 개선했다. 먼저 기업 마인드를 심었다. 학교의 고객은 학생이라는 점을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그는 “등록금을 내는 학생이 결석하면 용납할 수 있어도 급여를 받는 교수가 결강하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학생들에게도 엄격했다. 창의성 중심의 스파르타 교육을 시켰다. 그는 “들어올 때는 몰라도 나갈 때는 마음대로 못나가는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성적에 뒤처지는 학생은 무조건 퇴학시켰다. 100명이 입학하면 졸업생은 50명에 불과했다. 학생을 선발하는 기준도 바꿨다. 고등학교 성적에 연연하지 않았다. 디자인 소양과 열정만을 봤다.

아울러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세계적인 어워드 참여를 장려했다. SADI 프로덕트 디자인학과는 2005년 개설 이후 2006년부터 현재까지 레드닷(36점), iF(16점), IDEA(6점) 등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에서 총 58점을 수상하는 대기록을 달성하고 있다.

SADI는 iF에서 지난해 전 세계 학교들 중 누적 최다 수상 학교로서 iF 세계 디자인 대학(교육기관)부문 랭킹 1위를 기록한 바 있으며 이번 수상으로 올해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SADI의 선전은 학벌 중심의 한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다.

그의 성공 키워드는 단순하다. 기본에 충실한 것이다. 다만 사심이 없어야 한다. 사심 없이 기본에 충실하면 뭐든지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기본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는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곤란하다”며 “목표가 분명하면 무슨 일부터 해야 할지 선명하게 보인다”고 설명했다. 물론 목표를 정하더라도 집념을 갖고 추진해야 한다. 그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길이 나온다”며 “생각이 있으면 보이고, 보이면 걸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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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후배 CEO를 위한 원 회장의 조언

“사회에 이익이 되는 일 찾아야”

“등산을 하다보면 정상까지 오르는 데 너무 힘이 듭니다.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하지만 정상은 좁고 짧습니다. 금세 하산길에 나서야 합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반드시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CEO들이 정상의 시간이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정상에 오르는 순간 이미 자신의 향후 인생을 고민하고 밑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원대연 한국패션협회장은 CEO들이 정상에 올랐을 때 더 겸손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가 “자기 회사만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의 회사가 속한 업계와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CEO들이 자신의 인생과 기업 철학을 재점검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한국 대기업 CEO들은 대개 50대 중·후반에 퇴직한다. 퇴직 이후 대다수가 여행을 다니거나 휴식을 취한다. 20년 이상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는 후배들이 찾아와 “뭘 하는 게 좋겠느냐”고 물으면 두 가지 중 하나를 하라고 조언한다.

우선 사업을 원한다면 3~4개월간 베트남이나 중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라고 주문한다. 한국보다 삶의 수준이 낮은 곳에 사업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사업을 하지 않을 것이라면 봉사 활동을 권유한다.

CEO에 오를 정도의 재능과 경험을 갖고 있으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이 많다는 것이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 젊음을 바쳤다면 이제는 사회의 이익을 위해 남은 생을 보내야지요. 그것이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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