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시추 허용’ 반대 목소리 확산

기름 유출 대형 악재에 에너지법 ‘휘청’

<YONHAP PHOTO-1357> This image provided by the U.S. Coast Guard shows fire boat response crews battle the blazing remnants of the off shore oil rig Deepwater Horizon Wednesday April 21, 2010. The Coast Guard by sea and air planned to search overnight for 11 workers missing since a thunderous explosion rocked an oil drilling platform that continued to burn late Wednesday. (AP Photo/US Coast Guard)/2010-04-22 15:59:40/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화불단행(禍不單行·악재는 겹쳐서 온다)이라고 했던가.

미국에서 잇따라 대형 인재(人災)가 터지고 있다. 지난 4월 5일 웨스트버지니아에서 탄광 매몰 사고로 29명의 광부가 죽더니, 한 달도 채 안된 지난 4월 20일엔 멕시코만에서 12명이 사망하는 석유시추선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탄광 폭발 사고도 지난 1970년 이후 40년 만에 최악이고, 이번 시추선 폭발 피해도 미국 역사상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모두 인적·물적 피해가 크다는 점 외에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국민들의 생명과 직결된 사고들을 사전에 예방하지 못했고 사고 후에도 늑장 대응으로 피해를 부풀렸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11월 중간 선거를 앞둔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대형 악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이번 기름 유출 사고는 그가 지난해 말 전 세계를 상대로 공언했던 오염 가스 배출량 감축 선언의 실현 가능성을 매우 희박하게 만들고 있다. 미 언론들은 기름 유출 사태의 수습 과정 외에도 이에 따른 정치적 영향과 에너지법안의 운명 등에 주목하고 있다.

◇ 경제적 피해는 아직 ‘유동적’ = 사고가 난 석유시추선 ‘딥 워터 호라이즌’호에서는 지난 4월 20일 이후 매일 21만 배럴의 원유가 유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 정부는 유출을 막는 데 적어도 90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 인한 인근 어업계와 관광업계, 생태계가 입는 피해는 천문학적 규모에 이를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아직 정확한 피해 규모에 관한 수치는 나오지 않고 있다. 사태가 진행 과정이고 피해 규모를 결정하기엔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지만 아직 대재앙은 아니다”며 “지금은 9회 야구 게임 중 1이닝이 지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누구도 최종 스코어를 알 수 없다”고 보도했다. 날씨 상황과 조류의 방향, 기름 유출을 막기 위한 노력 여하에 따라 피해 규모가 변할 수 있다는 것.

예컨대 사고 열흘째인 지난 5월 2일엔 바람이 잦아지고 조류 방향이 남서쪽 방향으로 바뀌면서 상황이 크게 좋아졌다. 계속 이런 조건이라면 사고 수습 일정이 크게 단축될 수 있다는 것. 또 사고를 낸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 측이 기름 유출을 막기 위해 시추 장치에 캡을 씌우는 작업을 조기 성공시킬 경우 피해 규모는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사고 유발자인 BP는 일단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된다. BP 측은 피해 복구 및 보상과 관련한 일체의 비용을 전액 부담하기로 했다. 로이터통신은 전문가의 발언을 인용, 바다 청소비와 손해 보상금, 소송비로 약 50억~150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했다.

이런 손실 때문에 BP 주가는 사고 직후 14% 이상 빠졌다. 주가 하락에 따른 시가총액 손실분은 320억 달러(약 35조7120억 원)에 달한다. 지난 1989년 알래스카에서 발생한 기름 유출 사고 때 엑슨모빌은 피해 보상 등에 43억 달러 이상을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안 어업과 관광업계, 태풍 피해를 막아주는 늪지 등의 생태계는 이번 사태로 직접적인 피해를 보게 된다. 뉴욕타임스는 이들이 입는 피해 규모가 연간 16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번 사고가 유가 상승 등을 유발해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전망됐다. CNN머니는 최근 국제 유가 상승과 관련, 사고 여파라기보다 계절적 요인이 크다고 분석했다.

방송은 매년 4, 5월께면 가솔린 가격이 오르고 5월 10일에 최고가를 치는 게 통상적인 패턴이라며 5월 4일 현재 갤런당 2.90달러인 미국 내 가솔린 평균 가격이 올여름 3달러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방송은 이라크 전쟁 같은 지정학적 요인이 아닌, 이번 같은 단발적 사고가 중·장기적으로 원유 가격을 밀어 올릴 만한 요인이 되기는 힘들다고 분석했다.

◇ 오바마 카트리나? = 미국 언론들은 이번 사고를 환경·경제적 측면에서 보기보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전임 조지 부시 대통령의 전철을 밟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게 포인트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 남부 루이지애나 주를 강타했을 때 늑장 대응했다는 공세를 받고, 이후 정치적으로 치유 불능 상태에 빠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오바마 대통령의 대응도 늦은 감이 있다. 사고는 4월 20일 발생했다. 미 정부는 4월 23일까지 기름 유출이 없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으나 BP로부터 기름 유출 사실을 통보받고 바로 다음날(4월 24일) 이를 번복했다. 그리고 4월 28일에야 본격적으로 연방정부 차원에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

보수층이 이를 그냥 보아 넘길 리 없다. 지난 5월 3일 대표적인 보수 성향의 라디오쇼 진행자인 러시 림보는 이번 멕시코 기름 유출 사건을 ‘오바마의 카트리나’라고 단정 짓고 그의 늑장 대응과 위기관리 능력을 정면으로 문제 삼았다.

동종 업계에서 일하는 마크 레빈도 “시추 시설에서 폭발이 일어난 후 오바마 대통령이 대응에 나서기까지 8일이 걸린 이유가 뭔가”라고 물으면서 “오바마 대통령이 사태를 제대로 다룰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거들었다.

여론이 이렇게 들끓는 데도 미 공화당 지도부는 입을 다물고 있다. 평소 같으면 지도부 전체가 나서 오바마 대통령에 집중 포화를 퍼부을 만한 데도 하나같이 말을 아끼고 있다.

◇ 에너지법안 통과에 주목 = 이유는 간단하다. 미 상원에 계류 중인 에너지법안 때문이다. 이 법안에는 미국 대서양 연안과 멕시코만, 알래스카 북극해를 포함한 8개 지역에서 석유 시추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같은 내용은 공화당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오바마 대통령이 법안 통과를 위해 민주당의 진보 인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치적으로 결단해 수용한 대목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신 법안에 오염 가스 배출량 감축을 위한 제도적 장치들을 도입해 미국 내 오염 가스 배출량을 2020년까지 2005년 기준 대비 83% 수준으로 떨어뜨리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 내용으로 지난해 말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미국의 계획을 자신있게 발표했다.

에너지법안은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으로서는 오랜만에 한발씩 양보해 만든 윈-윈형 법안인 셈이다. 그런데 이 법안이 상원 통과를 앞두고 큰 암초를 만났다. 기름 유출 사태가 발생하자마자 민주당 내부에서 석유 시추 허용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

민주당 내 대표적 환경론자이며 시추 반대자인 빌 넬슨 의원(플로리다 주)은 “이번 사고를 계기로 연안에서 석유 시추를 허용하겠다는 계획은 사실상 끝장났다(dead on arriveal)”고 말했다. 다른 민주당 의원들도 시추 허용을 무산시키기 위한 별도의 입법 조치를 서두르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도 이런 분위기를 의식해 사고 후인 지난 4월 31일 미국 연안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석유 시추 공사를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백악관 측은 “이번 사고 원인이 무엇인지 알 때까지 공사를 진행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향후에도 시추를 전면 백지화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확실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시추 반대 의사를 받아들이자니 자신은 국제사회에 허언(虛言)을 한 사람이 되고, 법안을 강행하자니 여론과 일부 진보파 민주당 의원들의 반발 때문에 의회 통과가 힘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셈이다.

공화당 지도부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조용히 백악관과 민주당 진보파의 논쟁을 지켜보고 있다. 사실 공화당 지도부로서는 이번이 석유 시추 노력을 성사시킬 둘도 없는 기회다.

미국은 지난 1969년 샌타바버라 기름 유출 사태 이후 연안 시추를 전면 금지해 왔다. 그러나 에너지법안 도입을 계기로 오바마 대통령이 20년 만에 전격적으로 그 카드를 받아주기로 결정한 것. 이런 호기를 이례적인(?) 사고 때문에 그냥 놓칠 수 없다는 게 공화당 지도부의 속내인 셈이다.

채플힐(미 노스캐롤라이나 주)= 박수진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notwom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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