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다음은 일본’…국채마저 ‘찬밥’

고개 드는 국가 파산 시나리오

<YONHAP PHOTO-0785> People wait for a signal to change in front of the electronic stock indicator in Tokyo, Monday, April 19, 2010. After Monday's morning session, Japan's benchmark Nikkei 225 stock average lost 200.85 yen to 10,901.33.(AP Photo/Shizuo Kambayashi)/2010-04-19 14:26:06/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할아버지, 저 내년부터 충칭(重慶)에 가요. 전자부품 공장에 들어가요. 1만5000위안이나 준대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거의 1년간 백수로 지내다가 중국에서 겨우 일자리를 구한 일본의 젊은이와 할아버지의 대화다. 2020년 일본의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소설의 한 대목이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최근 1면 톱기사에 인용된 이 소설은 1998~2000년 경제기획청 장관을 지낸 소설가 사카이야 다이치(74) 씨가 쓴 것이다. 일본 경제가 파산해 1위안의 가치가 70엔에 이르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2010년 ‘1위안=13엔’이던 것이 2018년 ‘헤이세이 30년 대파국’을 거쳐 ‘1위안=70엔’으로 엔화 가치가 폭락한다는 이야기다. 요미우리는 이 소설을 빌려 일본 경제의 파산을 예고하면서 가장 큰 요인으로 재정 악화를 꼽았다.

현재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합친 일본의 공적 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200%에 이른다. 선진국 중 최고 수준이다. 소설은 이 비율이 2020년에는 250%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금은 이를 국내 금융자산으로 소화하고 있지만 이조차 어렵게 되면 외채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일본의 재정 악화에 따른 경제 파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그리스의 국가 도산 위기를 놓고도 “다음은 일본 차례”라는 지적이 공공연히 나온다. 세계 경제 2위 대국이던 일본이 어느새 정부 파산을 걱정해야 할 지경에 이른 셈이다.

◇ 국가 재정 파탄 지경 = 실제 그리스에서 시작된 재정 위기에 대한 경고는 일본으로 옮아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의 아시아 전문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은 최근 “투기자본이 그리스에 이어 일본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다”며 일본 재정 적자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앞서 시라카와 마사아키 일본은행 총재는 “그리스 사태 이후 투자자들이 일본에 대해 안심하지 못하고 있다”며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에게 “재정 적자 관련 대책을 마련할 것”을 이례적으로 촉구했다.

일본의 지난해 국가 부채 총액은 871조5000억 엔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경기 부양용 재정지출이 크게 늘면서 1년 만에 24조8000억 엔이 증가했다. 일본 국민 1인당 683만 엔(약 8200만 원)에 달하는 액수다. 일본 재무성은 올 회계연도 말에는 973조 엔까지 국가 부채가 늘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일본이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은 1990년대 거품 경제 붕괴 이후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실시한 것에서 시작됐다. 최근엔 고령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사회복지 예산 지출이 늘어나고 있다. 경기 침체도 계속돼 세수가 줄면서 적자 폭이 커졌다.

올해는 사상 처음으로 정부 예산 중 국채 발행액이 세금 수입액을 웃돌았다. 정부 부채가 많아 재정수입으로 원금은커녕 이자를 갚기도 버거워졌다. 정부는 이자 상환용 국채를 계속 발행하면서 빚을 빚으로 갚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금년에 일본 정부가 부담해야 할 국채 이자비용만 10조2000억 엔이다. 전체 세수의 26%에 달한다.

◇ 사방에서 파산 경고음 = 미국 신용 평가 기관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올 초 일본의 국가 신용 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언제든지 신용 등급을 낮출 수 있다는 사전 경고다. S&P는 재정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없고, 하토야마 정권의 재정 정책도 실망스럽다는 이유를 들었다. 일본의 국가 부도 위험을 반영하는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의 변동 폭도 커지고 있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최근 “일본이 재정 위기로 세계경제에 위협을 가하는 가운데 신용 평가사들이 이러한 상황에 경종을 울리지 않는 것은 범죄적이라고 할만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같은 보도가 나간 뒤 국제 신용 평가사인 피치는 일본의 국가 신용 등급 강등을 경고했다. 피치는 “지속적인 경기 회복과 재정 강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일본의 국가 부채는 계속 늘어나 국가 신용 등급 하향이 불가피해질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현재 글로벌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조만간 ‘국가 파산보호법’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점치고 있다. 이들은 그 첫 번째 대상으로 일본을 지목하고 있다. 포브스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천문학적인 국가 부채로 인해 일본의 국가 부도가 이르면 2011년, 길어야 3~4년 정도 버틸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국가 부도 우려는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에서도 새어 나왔다. 일본은행의 노다 다다오 심의위원은 “재정 악화가 장기금리 상승을 초래해 금융정책 효과를 무색하게 하고 있는데 시장이 이에 대해 강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최근 밝혔다. 국가 부도 리스크를 경고하는 지적으로 해석된다.

◇ 결단 못 내리는 정권도 문제 = 물론 일본이 채무 불이행을 선언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일본 국채의 90%는 국내 투자자들이 소유하고 있다. 외국자본 이탈 위험이 거의 없다.

1400조 엔에 이르는 가계 자산과 민간 부문 자금도 정부가 국채를 새로 발행할 수 있는 자금고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일본은 순 해외 자산이 225조5000억 엔에 이르는 세계 최대 채권국이다.

국민소득 대비 세금 부담 비율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이론적으로는 세금을 인상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세계 주요 통화인 엔의 위상으로 해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도 가능하다. 자체 통화가 없고 국내 자본이 미약한 그리스와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초저금리를 바탕으로 자금을 빌리는 것 외에 일본 정부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다. 저성장 경제에 접어든 데다 저출산·고령화로 세수는 줄고 지출은 늘어나는 추세다. 이를 앞으로도 피하기 어렵다. 결국 세금을 인상하는 등 과감한 재정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나 표를 의식해 임기 내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하토야마 정권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 경제성장이 유일한 희망 =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일본의 유일한 희망은 국내총생산(GDP)이 나라 빚의 이자액을 웃도는 속도로 성장하는 것이다. GDP는 연율 3%씩 성장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일본 경제는 지난해까지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앞으로 5년간 GDP 성장률은 2% 미만에 그칠 것으로 관측된다. 자율적 성장으로는 거액의 재정적자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2008년 12월 이후 계속 기준금리를 0.1%로 동결해 오고 있는 일본은행 입장에서는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금융정책 수단이 거의 없어졌다. 최근 경제지표도 밝지 않다. 디플레로 인한 소비자물가 하락세는 멈출 줄 모르고, 상업지 땅값은 40년 내 최저 수준이다. 여기에 산업 생산도 부진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세계경제가 회복 신호를 보이고 있지만 수요가 불안정해 수출 의존도 높은 일본 경제는 위태롭기만 하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동안 일본 국채를 소화해 왔던 국내 자금 여력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저축을 좋아하는 일본인들도 국채에서 등을 돌리고 있다. 공적연금도 연금을 지급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매도하고 있다. 일본은행 역시 국채 매입 규모를 늘릴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현재 택시에서까지 국채 광고를 하는 형국이다.

노무라증권에서 이름을 날렸던 빌 오버홀트 애널리스트는 “일본은 현재 상황이 지속되기 불가능하다고 판명되는 분기점에 급속도로 가까워졌다”고 지적했다.

차병석 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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