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의 벤처 붐 조짐 ‘신바람’

실리콘밸리에 부는 ‘린 창업’ 바람

미국 경제가 완연한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가운데, 미 실리콘밸리에서는 ‘린 창업 방식(lean start-up system)’이 새로운 창업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이 개념은 2년여 전부터 실리콘밸리의 인터넷 소프트웨어 개발 기업에서 적용되기 시작해 점차 미국 전역의 컴퓨터 관련 및 바이오테크닉, 청정에너지 분야 벤처 업계로 급속히 확산 중이다.

린 창업 방식에서 ‘린(lean)’은 낭비적 요소를 제거해 기업을 날씬하고 날렵한 상태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뜻한다. 도요타에서 시작된 이 같은 혁신은 종래의 대량생산 방식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창안됐다. 도요타는 자동차 생산 과정에서 낭비적인 요소를 제거해 자동차 1대를 생산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18시간, 부품 재고량을 2시간분으로 줄였다. 당시 세계 1위인 제너럴모터스(GM)가 각각 40시간(생산 시간), 2주분(재고량)이었던 데 비해 얼마나 생산 과정을 효율적으로 만들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낭비 줄이고 날씬하고 날렵하게

1990년 미 매사추세츠공과대(MIT)의 제임스 워맥 교수는 이 같은 도요타 생산 시스템(TPS)을 ‘군살 없고 날씬하며 낭비가 없는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이라고 칭찬하면서 처음 ‘린 생산 방식’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도요타의 생산 라인처럼 창업 단계에서도 낭비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한 채 군살없이 신속하게 기업을 설립해야 한다는 게 린 창업 모델의 핵심 개념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발 빠른 창업 방식의 부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어떻게 이 개념이 벤처 업계에서 확산되고 있는지, 성공 요인은 무엇인지 소개했다.

린 창업 모델의 주창자는 에릭 라이스(31)와 스티븐 블랭크(56)다. 에릭 라이스는 실리콘밸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과 기업 경영에 참가한 경험을 바탕으로 벤처기업들의 성공 요인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블랭크는 1978년부터 실리콘밸리에서 8개 기업을 창업하면서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 벤처 창업계의 노익장이다. 그는 현재 캘리포니아 주의 스탠퍼드와 UC버클리 대학에서 ‘벤처창업론’을 가르치면서 이 개념을 설파하고 있다.

린 창업 모델에서 중요한 개념은 ‘속도(speed)’와 ‘비용(cost)’이다. 최소 비용으로 최단 시간 내에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가장 간단한 형태의 제품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놓아야 벤처기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

린 창업 방식은 크게 제품 개발과 마케팅, 고객 관리 등 세 가지 과정에 적용된다. 에릭 라이스는 특히 제품 개발 과정에서 “고객들이 원하는 바를 파악해 이를 재빨리(agile) 개발한 후 시장에 내놓고 반응을 알아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돈을 많이 들여 완벽한 제품을 개발하지 말고 소규모 인원이 신속하게 제품을 개발하고 지속적으로 이를 업데이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이 같은 제품 개발 방식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가 인터넷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업체인 ‘페이스북(facebook)’이다. 페이스북의 창업자인 마크 주커버그(26)는 2004년 하버드대 기숙사에서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는 처음엔 핵심적인 메시징 기능만 만들었다가 사용자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자 그 후 새로운 기능들을 차례로 첨가하는 방식으로 성공했다.

라이스는 “대부분의 벤처기업들이 망하는 이유는 기술력이 떨어져서라기보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소비자의 기호와 제품 개발 단계의 실시간적인 접목을 성공 요인으로 지적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는 개발팀이 날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자신이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데어닷컴(there.com)이란 회사에서 3차원 가상 세계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실패한 경험이 있다.

이 회사는 당시 벤처캐피털들로부터 4000만 달러의 거금을 조달해 최첨단 기능을 수년간 개발했지만 한 가지 사업 계획에 너무 많은 돈을 투자함으로써 나중에 사업 방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진로를 바꾸기에 너무 늦어 망했다는 것.

그는 이후 ‘IMVU’라는 메신저 개발 업체에서 린 창업 방식을 적용해 성공했다. 이 회사는 현재 수백만 명의 사용자를 둔 인터넷 성공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뉴욕타임스는 린 창업 방식의 주요 개념인 비용과 속도 중에서 ‘속도’에 더 많은 비중이 있다고 전했다. 몸을 가볍게 해 개발 속도를 높이면 비용과 실패 확률을 동시에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 같은 새로운 창업 모델이 확산되면서 벤처캐피털 업계에도 변화의 시기가 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존의 벤처 창업 모델은 초기에 수백만∼수천만 달러의 자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벤처캐피털의 역할이 컸지만 새로운 창업 모델에 따르면 50만 달러 정도의 초기 자금이면 충분히 창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실리콘밸리의 거대 투자 기업들보다 론 콘웨이나 데이비드 매컬리, 마크 메이플 주니어 같이 소규모 액수를 수십 개 벤처에 분산 투자하는 전문 엔젤 투자자들의 활약이 더 부각되고 있다.

한편 미 언론들은 린 창업 방식 같은 새로운 창업 모델이 유행하는 등 미 벤처 업계엔 10년여 만에 부흥의 기미가 완연하다고 보도했다. 일부에서는 최근엔 ‘소셜(social)’이나 ‘모바일(mobile)’이란 단어만 들어가도 엔젤 투자자들이 몰린다며 ‘2차 버블(bubble)’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있다.

엔젤 투자자 몰려…2차 버블 우려도

전미벤처캐피털협회(NVCA)에 따르면 미국의 지난 1분기 벤처캐피털 투자 금액은 47억3000만 달러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38% 증가했다. 총 투자 기업 수도 681개로 7% 늘었다. 협회는 올해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금이 총 2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같은 기간 벤처기업에 대한 인수·합병(M&A)도 111건에 달해 조사가 시작된 1975년 이후 35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벤처기업들의 기업공개(IPO) 건수 역시 2007년 이후 4년 만에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 위기로 벤처 투자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2008년 2009년에 비해 상황이 확실히 호전되고 있는 것.

실리콘밸리 지역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은 최근 일부 벤처 기업에 한꺼번에 수천만 달러, 수억 달러의 투자금이 쇄도하는 등 투자 과열 조짐까지 되살아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뉴욕의 벤처 게임 업체인 ‘포어스퀘어(foursqure)’는 아직 확실한 사업 모델과 시장성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 업체들과 야후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지분 매각과 인수 제의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이 회사의 가치는 10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실리콘밸리의 소설 네트워킹 벤처 게임 업체인 ‘징가(Zynga)’도 러시아 회사로부터 투자 제의를 받고 1억8000만 달러에 지분 일부를 팔았다. 일부 벤처캐피털 업체 관계자는 “사업 모델을 증명하기도 전에 기업 가치가 미친 듯이 뛰고 있다”며 “이는 버블의 초기 지표(early indicator of a bubble) 중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신문은 다른 한편에선 현재 상황이 10년 전 버블 때와는 확실히 큰 차이가 있다고 분석했다. 거액의 뭉칫돈들이 몰리고 있지만 업계 전반의 얘기가 아니라 일부 업체에 국한되는 현상이라는 것. 버블 시대의 ‘묻지마 식 투자’가 아니라 그래도 어느 정도 매출과 수익이 나고 있고, 시장성이 있는 벤처에만 투자금이 몰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때문에 벤처 업계에는 새로운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아직 경제 위기가 확실히 끝났다고 단정하기 힘든 상황에서 한정된 투자 자금이 유망 기업에만 쏠리기 때문에 나머지 기업들은 아직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벤처캐피털 업체인 앨레기스 캐피털의 피터 보딘 씨는 “버블은 버블이지만 매우 한정적이고 수직적인 형태의 버블(narrow and vertical bubble)”이라고 진단했다.

유망 기업들에 몰렸던 자금들이 차선책을 찾아 나머지 기업들로 넘쳐흘러가는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고 그 사이에 나머지 기업들은 여전히 자금 경색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채플힐(미 노스캐롤라이나 주)= 박수진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notwom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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